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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Dec 21. 2020

기울어진 운동장에 날리는 펀치, 퀸스 갬빗

넷플릭스 오리지널 미니 시리즈 퀸스 갬빗 리뷰

     




 <퀸스 갬빗>은 윌터 테비스가 1983년에 발표한 소설 《The Queen's Gambit》을 바탕으로 넷플릭스에서 만든 7부작짜리 오리지널 미니 시리즈다. 1950년대 말, 버려진 고아 소녀 베스가 체스라는 보드게임에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체스 세계를 정복해가는 게 이 드라마의 주된 내용이다.     



 



 주인공 베스 하먼은 남성이 주가 되어 지배하는 체스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실력이 아닌 성별로 주목받는 것에 대한 부분을 경계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베스가 자신이 인터뷰한 내용이 실린 잡지와 신문을 살펴보며 “왜 다 내 실력이 아닌 여자라는 이야기만 하는 거지?”라고 말한 씬이었다.   


  

 1950 ~ 196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본다면 해당 씬에서 실력이 아닌 성별을 두각 시키는 것에 대한 의문이 들지 않고 자연스레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스는 실력이 아닌 성별로 주목받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그 모습이 더없이 주체적으로 느껴져서 나는 베스가 좋아졌다.     



 주체적인 캐릭터가 아닌 그저 다승 하는 천재 소녀 캐릭터로 그쳤다면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캐릭터는 널리고 널려서 너무 뻔하니까. 클리셰를 답습하지 않고 주체적인 성정을 지닌 캐릭터로 설정했기에 베스가 비로소 매력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건, 이 드라마에는 소위 말하는 ‘빌런’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퀸스 갬빗>을 보면서 이 캐릭터는 분명히 빌런이다! 싶을 정도로 짜증을 자아내게 만든 캐릭터가 몇몇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빌런이 아니었고 되려 베스의 조력자여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빌런 캐릭터가 나오는 자극적인 영상에 길들여져서 인지는 몰라도, 빌런이 나오지 않는 드라마를 보니 색달랐다. 무엇보다 마음이 편했다. 누군가가 주인공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게 이토록 편안한 것 인 줄은 몰랐다. 마음을 졸이며 시청하지 않아도 되니 정지 버튼을 누르는 일도 드물었고 말이다.     





 <퀸스 갬빗>은 체스가 주 소재로 나오지만, 단순한 체스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페미니즘, 약물, 퀴어, 패션적 요소가 자연스럽게 드라마와 물아일체 되며 잘 녹아있다. 빌런도 없고, 주인공은 맨날 이기기만 하는 드라마라면 굳이 내가 이렇게 리뷰를 쓰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이 드라마를 통해 그 시대의 약물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어린아이들에게 낳았는지도 알 수 있고, 그 시절의 패션과 인테리어, 올드팝등도 섬세하게 표현되어 눈이 즐거웠다. 여성들의 연대도 아름답게 그려져서 따스했다. 비단 여성과의 연대뿐만 아니라, 베스는 성별이 아닌 실력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싶은 포부처럼 성별을 뛰어넘어 남성들과도 연대를 쌓는다. 이러한 연대들을 통해 베스는 남성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체스판에서 여성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게 되는 토대를 만들어 간다. 잠시 스치듯 나오는 은근한 퀴어적 요소도 매혹적이었다. 전면에 퀴어적 요소를 내세우지 않고, 은은하게 심어놓은 걸 보며 각본가와 연출가가 얼마나 노련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퀸스 갬빗>을 다 보고 나면, 주인공 베스 역을 맡은 안야 테일러 조이에 반하고 체스 말이 눈앞에 어른거리게 될 것이다. 내가 딱 그랬으니까. 정주행을 마치고 난 후, 무언가에 홀린 듯이 체스판을 검색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재생을 누르는 순간 당신도 나와 같은 수순을 밟게 될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 매혹적인 체스 드라마가 당신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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