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선암사 템플스테이
저녁 예불을 마치고 방에 들어와 다시 바닥에 누웠다. 찬바람을 쐬었더니 온몸에 차가운 공기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는데, 훈훈한 온기가 감도는 방에 누우니 언제 그랬냐는 듯 스르르 찬 공기가 흩어졌다. 차담 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남아서 누워서 챙겨온 책을 읽었다. 속세에서는 딱딱한 책을 읽었지만, 여기서는 한 템포 쉬어갈 수 있게 가벼운 책을 읽고 싶어서 <태국 문방구>의 책장을 넘겼다. 곧 태국 여행을 갈 예정이라 책에서 흥미로운 문방구를 발견하면 가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한창 책을 읽다보니 저녁 차담 시간이 되었다. 차담을 위해 차담 장소로 가니 인원수에 맞게 방석이 깔려 있었다. 무심코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가, 너무 가운데는 눈에 띄는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구석자리로 옮겨서 앉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에 착석하고, 이내 차담이 시작되는 듯 했으나 일행끼리 온 어린 친구가 차담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친구가 체했는지 지금 방에 누워 있다고 해서 다들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병원도 멀리 있는 첩첩산중에서 아프다니.
다행히도 보부상처럼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상비약을 챙겨 다니는지라, 내가 약을 주기로 했다. 내 옆에 앉은 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일어나는 것인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의사라고 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상비약이 있었고, 그 자리에 의사까지 있다는 사실이. 타이레놀과 훼스탈을 챙겨서 아픈 친구에게 건네주었고, 의사 선생님은 그 친구의 상태가 어떤지를 살폈다. 체한 친구를 살핀 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차담 시간은 원래의 시간보다 더 길어져 여덟시 삼십분이 가까워 올 때쯤 끝이 났는데, 그 시간동안 스님이 내려준 선암사표 작설차를 마시며 각자 선암사에 오게 된 계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들 표면적인 이유만 말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모두 많이 지쳐서 이곳을 찾았다는 걸.
따뜻하게 몸을 데우는 차를 마시고 난 후, 방에 들어가 책을 마저 읽고 잘 준비를 했다. 평소 내 취침시간보다 훨씬 이른 아홉 시 반쯤 잠자리에 들었는데, 알찬 하루를 보내서인지 하루가 생각보다 길게 흘러간 느낌이었다.
*
새벽 한 시쯤 잠에서 깼다. 원래도 깊게 자지 못하는 편이라 잘 깨곤 하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달랐다. 잠을 몇 시간 자지 않았음에도 평소보다 개운했다. 방에 누워 어둠이 짙게 깔린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을 읽다보니 어느덧 세시. 세시 사십분부터 새벽 예불이 시작 되는지라, 이왕 일어난 김에 새벽 예불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저녁 예불이 시작 될 때처럼, 북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지고 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을 마주하며 방을 나섰다. 나 홀로 새벽 예불에 참석할 줄 알았으나, 전 날의 의사 선생님도 때마침 새벽 예불을 위해 숙소를 나서고 있었다. 어제 통성명을 했는데, 이름이 겸이라고 했다. 워낙 동안이어서 나보다 어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언니여서 나름의 반전이었다.
겸 언니와 함께 대웅전을 향해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무수히 많은 별들이 조계산의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별자리들이 선명하게 보이는 새벽하늘을 본 건 오랜만인지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불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움직여야만 했다.
대웅전에 도착해 새벽 예불을 드렸다. 새벽 예불은 저녁 예불보다 훨씬 긴 시간 진행되었고, 긴 시간만큼 절을 하는 횟수도 훨씬 많았다. 처음에는 호기롭게 절을 했으나, 예불 막바지에는 다리에 일시적으로 힘이 풀렸다. 물류센터에서 일해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절을 하는 체력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새벽 예불은 무척이나 신비로웠다. 불경을 읊는 스님들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음악처럼 들리던 순간들. 온갖 잡념들이 가득한 시간들을 뒤로 하고, 비움이란 이런 것 이구나를 느끼자 비로소 해방감이 들었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방에 들어와 누웠다가 아침 공양을 위해 다섯 시 반에 방을 나섰다. 어제의 결심대로 오늘은 꼭 고추장을 듬뿍 퍼서 밥을 비벼 먹을 계획이었다. 내 결심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밥을 비벼먹기 좋게 나물류가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그릇에 종류별로 반찬들을 담고, 고추장을 퍼서 밥을 비벼 먹었다. 아아, 정말 또 먹어도 환상적인 맛이다. 인생 고추장을 사찰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