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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Dec 17. 2023

설이

기억의 단상 2020년 10월호

 

 설이와 나는 루앙프라방에서 방비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처음 만났다. 외국인들이 득실대는 차 안에서, 낯익은 한국어가 들려서 한국인인 줄 알고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는데 놀랍게도 설이는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었다. 괜히 조금은 멋쩍어져서 나는 설이에게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차에 박혀 방비엥으로 향했다.     


*     


 설이를 다시 만난 건 여행자들이 많이 모이는 방비엥 사쿠라바에서였다. 여느 때와 같이 사쿠라바에서 흥을 뽐내며 관절이 아프도록 춤을 추다가 그곳에서 친해진 언니 오빠들과 술을 한 잔 하고 있는데, 그들이 합석하자며 설이를 불렀다. 어떻게 설이와 아는 건가 싶었는데, 태국을 여행할 때 만났다고 했다. 그들도 설이도 태국을 여행하고 라오스로 건너왔다고 했다.      


 태국에서 라오스로 건너온 이들 사이에 앉아 나는 그들의 태국 여행 이야기를 들었고, 설이는 유창하게 한국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분명히 방비엥으로 오는 차 안에서는 어색했는데 사쿠라바에서 다시 만난 설이는 친근했다. 우리는 금세 친해졌고, 매일 사람들과 함께 만났다.      


 설이는 탕웨이를 닮았다. 탕웨이가 어릴 적에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덕질을 할 정도로 탕웨이를 좋아하는지라, 나는 탕웨이를 닮은 설이에게 더 호감이 갔다. 설이도 국경을 뛰어넘어 여러 이야기가 통하는 나를 잘 따랐고, 우리는 방비엥에서의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     


 방비엥 마지막 날 밤이었다. 사람들은 다 숙소에 들어가고, 나와 설이만 남아 있었다. 설이와 나는 비바라는 이름의 펍 근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생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술이 잔뜩 취한 남자가 다가와 같이 합석하자며 설이에게 치근덕댔다. 가라고 해도 가지 않는 남자의 모습에 설이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보는 나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 싫어하니까 가던 길 가라고 했다. 우리는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말도 덧붙여서.      


 그러자 그는 마치 화풀이할 타깃이라도 잡은 듯 니가 뭔데 그러냐고, 둘이 사귀기라도 하냐고 씩씩거렸다. 얼른 쫓아내 버려야겠다는 생각에 “그래, 사귄다. 꺼져.”라고 말했더니 그는 얼굴을 잔뜩 붉히며 우리를 떠났다. 꺼지라는 말은 너무 했나 싶어서 머리를 긁적이는데 설이는 속 시원해진 표정으로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고마울 게 뭐가 있나 싶었는데, 그가 정말 끈질기게 치근덕거리던 걸 생각하면 수긍이 되기도 했다. 설이가 말했다. 자기 숙소에 한국 소주 있는데, 가서 한 잔 더 하자고. 그래서 설이네 숙소로 자리를 옮겨 우리는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설이는 내가 내일 방비엥을 떠난다는 게 아쉬운 눈치였지만, 나는 떠나야 했다. 설이를 두고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지만, 여행의 막바지여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돌아가는 비행기 날짜가 코앞이었으니까. 숙소로 돌아가 짐을 싸는데, 계속 설이가 어른거렸다.


 이제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중국을 가거나, 설이가 한국에 오지 않는 이상 우리가 만나기란 힘든 일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가끔씩 설이와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올해는 그러고 보니 연락을 하지 못했다. 생각이 난 김에 오랜만에 설이에게 연락을 해봐야겠다. 타국에서 생긴 나의 새로운 동생, 설이. 오늘따라 설이가 많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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