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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Jan 26. 2024

2023. 04. 11

1부 45화

 

 오늘은 4층에서 내내 집품을 했다. 종일 존배치와 긴급 피킹 건들을 쳐냈다. 보통은 일정 시간 동안 긴급건을 쳐내고 나면, 일반 집품건들로 바뀌는데 반해 어째서 내 PDA에는 긴급만 떴다. 그 정도로 내 집품 속도가 빨랐던 걸까. 아니면 긴급을 쳐낼 사람이 별로 없었던 걸까.     


 긴급 때문에 더 빠른 속도로 오가며 집품을 하느라 진이 다 빠졌는데,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나와서 집품에 사용한 PDA를 반납하고, 무심코 사람들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쉬는 시간이 끝날 무렵 올라오자 캡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PDA를 반납했다고 해서, 모두 메인에 모이지 않았는데 먼저 내려가 버려도 되는 거냐고 사실 관계 확인서(C사의 자체 반성문)를 쓰라고 했다. 엘리베이터에는 나 말고도 여덟 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는데, 다 같이 사실 관계 확인서를 써야만 했다.     


 분명히 나 말고도 여덟 명의 사람이 더 있었음에도, 유독 내 이름을 자주 호명해서 이야기를 이어가서 기분이 내내 찜찜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퇴근 직전에 캡틴을 따로 찾아갔다.     


“기다렸다가 내려갔어야 하는데,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부분은 제가 성급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할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석류님은 오래 일하셨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다 알거라 생각해서 배신감이 좀 들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말해주시니 좋네요. 사실 관계 확인서는 별일 없을 겁니다.”     


 사실, 내가 캡틴을 찾아간 이유에는 찜찜함도 있지만, 사실 관계 확인서 때문도 있었다. 혹시나 사실 관계 확인서를 작성하게 됨으로써 근무 확정이 뜨지 않게 되는 불이익이 생긴다면 골치 아프니까. 사실 관계 확인서를 적던 그 순간이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캡틴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실 관계 확인서 부분은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졸지에 내가 총대를 메고 대표 격으로 사과를 한 상황이 됐다. 어찌 되었든 사실 관계 확인서 부분이 해결되고 나자 그제야 안도가 됐다.      


 근무 중 내 실수나 부주의로 사고가 벌어진 것도 아닌 쉬는 시간에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먼저 타고 내려갔다는 걸로 근무하는데 불이익이 생긴다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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