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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antasmo Jun 11. 2021

긴긴밤, 우리

긴긴밤 우리가 지나온 무거운 발걸음에 대한 이야기


저녁을 먹고 빈백에 앉아 긴긴밤을 펼쳤다. 아이는 새로 산 문고판 명작동화를 읽고 나는 긴긴밤을 읽는다.

처음부터 코끼리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나는 책에 빠져서 다시 아이에게 신경을 쓸 여력도 없었다.


"하은아 너는 빨리 들어가서 온라인 수업 마저 들어."라고 대충 해야 할 일들을 던지고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실은 계속 울었다. 중간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울면서 책을 읽어 내려갔다. 모두 다 알 것 같은 이야기인데 빠져나올 수도 없이 옴짝달싹 못한 채  책 속 치쿠가 된 마냥 마지막까지 내 알을 지켜달라는 마음으로 끝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난 가끔 왜 살아야 하나? 란 질문을 자주 한다. 그 질문은 여러 투정과 감정을 담고 있다.

살기 힘들다는 일반적인 투정과 ''라는 당위성을 부여하고 싶다는 절실함도 있다. 그래서 가끔씩은 미래 예언을 유튜브에서 찾아보기도 한다. 그러면 수많은 예언가들이 인류의 미래를 언한 자세한 상황이 묘사된다.  미래는 끝도 없이 우울하기도 하고  뒤에 밝은 미래를 예언하기도 한다. 그렇게  극적인 상황 뒤에 예언가들의 보여주는 인류의 끝은 화합과 영적인 세계를 이룬다는 것에 마음이 평안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미래를 점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이기도 하니   예언을 저절로 믿어버린다.


그래.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날  같은 상황에도 우리는 그곳에서 내일을 이야기할  있을까? 내가 어디로 갈지 모를  펭귄의 감을 믿으며 끝까지 함께 걸어줄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비록 펭귄이 되는 법은 가르쳐   없지만  몸을 바쳐 자신이 알고 있는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조금   발자국 내딛는  쉬어지겠지? 하지만 마지막 바다까지 가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을 둘을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내가 호흡하는 하루하루가 온전히 즐기는 나만의 삶이 아니라는 무게감도 느껴지지만, 그래도 내가 그들로 인해 여기까지 왔으니 나는 좀 더 힘을 내야겠다는 마음도 느껴지고, 그래도 그 무거운 마음은 바람에 실려 보내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래도 난 더 잘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루하루 살아 숨 쉬는 날들이 그들의 바람이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지다가도 우리는 어디서 오고 또 어느 이야기에서 시작해야 하나 생각이 점점 더 많아진다. 늘 그렇듯 마음은 늘 가벼운 듯 복잡하게 얽힌다. 단순함과 거리가 먼 나의 성향 때문인 걸까? 아니면 삶이란 단어가 그런 모든 복잡한 것들의 총체인 걸까?




'자기 앞의 생'을 읽어 본 사람들은 모두 책 내용은 다 잊어도 마지막 한 문장은 잊지 못할 것이다.


사랑해야 한다.


 마지막 문장 같은 문장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사랑해야 한다'라는 문장만큼 담백하고 핵심적인 문장은 만들  없다. 사랑해야 한다라는  숙제만큼 낙관이나 비관을 배제한  살아가야  가장  이유, 마음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페달을 돌려대는 듯한 그런 감정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되고 나서  흔들리면서도  강하게  뒤따라오는 살아야 한다는 충동에 휩싸이는  같다. 엄마라는 자리에서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 강하게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게 하나? 그리고 왜이리  스스로를 나약하고 초라하게 느껴지게 하나?  가지 생각에서 매일 왔다 갔다 한다. 그러면서 더더욱 강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문장을 살아내고 있다. 나약하지만 복잡하면서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긴긴밤을 읽으면서 여러 책과 영화들이 생각났다. 왠지 신시아 라일런트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단련 중 하나에 들어가도 모를 것 같기도 하고, 디카프리오가 사냥꾼으로 대자연속에서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야기인 '레버넌트'가 생각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 개인적으로 많이 좋아하는 그림책 '우리의 모든 날들'이 생각났다.


우선 '우리'때문에 더더욱 생각났고, 긴긴밤처럼 '우리의 모든 날들'에서도 이야기를 전해주는 화자가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다음 세대의 아이의 목소리로 전해진다. 그 이야기를 전하는 아이의 세계는 이미 그 이야기를 전해준 그 앞선 세대의 세상을 보는 시선이 그대로 담겨있다.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전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전해줄 가장 큰 숙제이기도 하다.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 속에서 언제까지 살아갈 수 있을지 시한폭탄 같은 지구에서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다고 말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이미 어른이라면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으로서 한걸음 한걸음 잘 걸어야 하고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 더더욱 생각해야 한다. (아, 또다시 진지충이 되었다.)


이런 맥락으로 '우리의 모든 날들'이 매우 '긴긴밤'과 같지만 다른 결의 이야기라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의미로 두권다 읽어보시길 추천드려요)


 


솔직히 말하면 중간부터 충격을 먹고 마지막까지 책장을 넘기면서는 거의 오열하면서 책을 읽었다. 아무래도 내가 오버한 것 같기도 하다. 계속 자기 방에 있다가 흐느껴 우는 나를 보며 하은이는 엄마 슬퍼서 우는 거야? 왜 슬픈데 계속 책을 보는 거야? 도대체 뭐가 그렇게 슬픈 거야? 계속 질문을 쏟아낸다.

나는 대충 ', 그냥 너무 슬퍼. 사람들이 동물들을  죽여서.'라고 얼버무린다.

나도  모르겠다. 동물들이 죽어서 슬픈 건지, 이야기가 아름다워서 슬픈 건지, 남은 이들이 끝을 모르는 길을 걸어가는  슬픈 건지, 마지막까지 누군가의 옆자리를 계속해서 지켜주는  슬픈 건지,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며 이야기 시작들을 들려주고  들려주는  슬픈 건지 나도 모르겠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루리 작가의 그림을 보며 마지막 위로를 받았지만 좀처럼 마음이 진정이 되지는 않다. 쉽사리 잠이 들 것 같지가 않아서 브런치에라도 책일기를 남긴다. 루리 작가의 그림이 좋아서 이야기에 더 몰입해서 읽었다. 나는 계속 읽으면서 치쿠에 이입해서 치쿠의 마음으로 읽었는데, 다른 이들은 어떤 마음일지도 궁금하다. 누군가는 마지막 그 펭귄의 마음일까? 그 펭귄의 어투가 좀 더 아이스러웠다면 마음이 편했을까? 왜 이리 인생을 모두 알아버린 듯한 어투는 마지막까지 마음을 막막하게만 만드는 건가.

이래서 많은 피드들에서 긴긴밤의 장황한 리뷰를   있었구나. 생각이 많아지는 이야기.


마지막까지 함께 그 길을 걸은 치쿠와 윔보와 앙가부와 코끼리들의 마지막 밤들이 부디 따뜻했기를 바라며 이 글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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