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의 생존자와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한 아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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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1일 마무리
지난 주말 아트 슈퍼겔만의 ‘쥐’를 읽었다.
이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까?
1. 아우슈비츠, 유태인 대학살을 담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2. 아버지 세대와 자식 세대 간의 서로를 이해하고 갈등을 조금씩 좁혀가는 이야기로
3. 나이를 들어감에 따라 불안과 불신의 견고해짐과 자신의 세계가 점점 견고해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이렇게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이야기는 1과 2 정도에서 정리를 하려고 한다.
그래픽노블 <쥐>는 만화를 그리는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의 기억을 녹취하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 사이사이 아버지와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자신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지만 어떻게든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의 이야기를 만화로 담고 싶다는 열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가로서의 고민과 갈등, 그리고 아버지의 2차세계대전 안에서 홀로코스트 기록을 담아냈다.
아버지는 본인의 기억과 녹취에 따르면 대단한 생존본능으로 어떻게 하면 살아남는지에 대한 감을 갖고 있고 잔머리의 대가로 보인다. 매 순간순간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쓰고 집에서 은둔생활할 때는 자신만의 비밀공간을 만드는 법이나 수용소에서도 처세술 등 평생을 생존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 사람으로 보인다. 초반에는 자신의 귀중품들을 팔아 어떻게든 생활을 영위한다. 하지만 거주지에서 쫓겨나고서도 사람들에게 신세를 갚기도 하고 또 신세를 지기도 하고 자신이 나서지 말아야 할 때를 판단하는 것, 그리고 겨우겨우 먹고 살아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안에서 배급되는 빵을 늘 반만 먹고 반은 남겨둔 채 그것으로 많은 것들을 교환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아내에게 전달해 준다던지 다른 용도로 이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하나하나 언급하기에 너무 많은 것들이지만 그런 습성은 평생을 따라다닌다. 노년에 미국에서 비교적 여유롭게 노후를 보내게 되었지만 1 페니도 쓰지 못하게 하고 길에서 쓸모 있는 것들은 주워와 저장해 둔다. 그런 그의 저장강박증은 그의 몇년의 시간 안에 생존본능과 함께 세포에 각인된 듯하다. 대략 1939년에서 1945년까지의 이야기. 그 긴 시간을 매일매일을 생존하기 위해 살아낸 그의 시간은 그 사람의 강한 정체성이 되어버려 그렇게 평생을 살아갔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많은 이들이 부모와 자녀세대의 갈등에 깊은 공감이 되었다. 나도 전쟁을 겪고 전쟁 이후의 폐허에서 다시 쌓아가는 세대인 아버지와 그 이후의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는 세대에 속한 나 사이의 갈등이 여실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아주 어린시절 이북에서부터 6.25로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가 서울로 올라와 해방촌에 터전을 마련해서 살아가는 분이었다. 나 또한 그런 아빠에게 느껴지는 강박증적인 행동들에 격하게 불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조심하고 다치는 것, 과격하게 행동하는 것에 끝없이 집착하듯 잔소리하는 아빠 옆에 있으면 숨도 편히 쉬지못할 것 같은 옥죄이는 감정을 느낄 때가 많았다. 자신의 세상 안에서 만든 룰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 같은 잔소리는 1초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고 비논리적으로 계속 자신이 맞다고 말하는 상황들로 대화하기가 싫어지기 때문이다.
아트 슈피겔만은 이야기 안에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니까, 나 자신이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아우슈비츠의 의미를 찾을 수가 있지? 대학살에 대해서도 말이야?”
이야기 밖으로 나와서 아우슈피츠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은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고 여러 가지 버전으로 읽었지만 이 책만큼 긴박감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는 없었다. 내가 접한 홀로코스트의 이야기는 우리 세대가 가장 많이 본 영화 ‘쉰들러 리스트’와 ‘인생은 아름다워’였다.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워'는 그곳에서 가장 인간다움, 그리고 희망을 놓지 않고 아름답게 만들어준 영화였기에 먹먹한 마음으로도 볼 수 있는 영화였고 ‘쉰들러 리스트’는 어릴 적 모두가 본 영화이기에 꼭 봐야만 하는 줄 알고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인간은 세포에 각인되는 듯한 공포와 고통을 겪고 나면 그것을 기록하고 누군가에게 전달하려는 듯 하다. 인류가 다시 겪어내지 말아야 하는 역사이고 다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무의식에 다시는 그런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깊이 각인시키려고 그러는 것일까? 그리고 사적인 고통의 이야기도 가장 보편적인 감정에 다다르고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그 고통에 공감한다. 내가 겪어본 가장 최악의 상황들... PTSD를 각 세대들이 역사의 굽이굽이 함께 공유하며 그 비슷한 감정을 공감하며 그 세대의 문화와 습성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그렇게 조성된 두려움이 반복되는 고통에서 도망치기 위해 노력을 하게 만드는 걸까?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유는 공감하는 두려움이 우리 세포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에게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다>
내가 아이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어. 어찌 보면 가장 잔인하고 너무나도 무책임한 말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서 모든 것은 그랬다. 그 누구도 한 어린아이의 삶을 책임지기 위해 모든 것을 제공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이런 생각의 끝에 나 스스로 ‘이 세상에 창조자는 있어도 신은 없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창조자는 인간을 세상에 만들었을지언정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가스실에서 수많은 유태인들이 죽어갈 때 문 앞에서는 노약자를 밝고 올라서 어떻게든 나가려고 발버둥 친 가장 힘센 이들의 시체가 위에 있었다고 한다. 더 최악은 그 가스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가스실 앞에 거대한 수영장만 한 구덩이에 산채로 묻힌 유태인들이라고 <쥐>에서는 말한다.
오래전 <자유의 길> 그림책을 보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노예의 삶이 아닌 노예선의 묘사였다. 칸칸이 노예들을 쌓아두고 흑인들의 손목, 발목, 목에 쇠사슬로 옭아매고 오물이 위에서 아래로 그대로 흐르는 대로 둔 채 육지까지 항해하였다. 그런 노예선을 ‘떠다니는 지하감옥’이라는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래픽 노블 <쥐>에서도 전쟁의 끝 무렵 유태인들을 아우슈비츠에서 독일로 이송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며칠을 화물칸에 더이상 넣을 수 없을 만큼 빼곡히 들어가게 한 뒤 음식도 물도 주지 않은 채 열차는 알 수 없는 공간을 달린다. 블라덱 슈피겔만은 자신만의 생존방법으로 자신의 담요를 천정의 갈고리에 묶어 창가 쪽 천청에 둥둥 떠서 창밖의 눈을 먹으며 살아서 갈 수 있었다. 그 열차 속의 많은 사람들은 압사당하거나 서로를 칼로 찌르거나 그런 시체 위에 또 올라서서 겨우겨우 화물차에서 생존했다.
그렇게 생존의 문제에서 그래픽 노블 <쥐>는 바이블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하는 순간순간의 고민에서 그 주인공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살아남았다. 허나 살아남은 이들 중에도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허무하게도 자신이 돌아온 폴란드에서 죽음을 당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픽노블 <쥐> 읽는 것보다 글을 정리하는 과정이 에너지가 많이 소진된다. 계속 그 감정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게 고되고 마음은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마음을 추스르기엔 그 기억의 조각조각들이 ‘아냐, 난 모르겠어. 너무 힘들어.’라고 외치며 자꾸만 아래로 내려간다. 그래도 이렇게 책을 읽은 나의 기억을 모아보았다.
그런데 현시대에서 그래픽노블 <쥐>를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비교적 대한민국은 평온함을 유지하며 전시상황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지내고 있지만, 현재 지구의 다른 곳에서는 여러 가지 목적으로 총을 쏘고 미사일을 쏘는 일들이 지속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평화는 인류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이지만 많은 요소들이 갖춰져야지만 지켜낼 수 있는 게 평화일 것이다.
그래픽노블 <쥐>에서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유태인들이 왜 저항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네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았단다. 다들 너무나 굶었고 겁에 질리고 힘들어서 눈앞에 벌어지는 일조차 믿을 수가 없었지.… 어떤 곳에선 싸우기도 했었지… 하지만 독일 놈 하나 죽이기 전에 우린 벌써 100명이 죽는 걸. 그럼 다 죽는 거야.
… 그래서 이런 식으로 다 죽었지. 어쩌겠니?”
라고 아버지는 대답한다.
그 질문과 대답의 과정 가운데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그 간극과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그 현장에서의 무력함이 느껴졌다. 6년 정도의 시간 동안 서서히 몰아가는 유태인들은 어떻게 저항할 수 있었을까? 집, 마을, 직장을 빼앗고 음식도 주지 않은 채 동물보다 더 못한 벌레 같은 취급을 하며 죽기 직전의 상태로 유지한 채 끊임없이 노동을 시켜온 그들의 눈 앞에 ‘저항’이란 단어는 그저 자신의 목숨만이 아닌 공동체의 목숨과 맞바꿔야 하는 가치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새해를 맞이하며 나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으나 글을 다시 정리하며 더 무거운 마음에 휩싸였다. 책을 읽을 때는 그의 생존의 번쩍이는 아이디어와 본능적인 기지들이 재미있었고 그래도 어떻게든 삶을 살기 위해 처절하게 도망치고 회유하고 기회주의자 같은 모습들이 뒷 이야기가 궁금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글을 정리하려고 보니 순식간에 무거운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왠지 그런 글을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냥 짧게 그의 그런 위트만을 언급하기에는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글쓰기 과정에서 내 안의 그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죄의식과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중압감을 느끼는 것을 알아갔다. 본능적으로 스스로도 각성하고 다시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다다러서는 블라덱 슈피겔만은 고집불통의 모습에서 차츰 고집도 약해지고 노쇠해진다. 이야기에서 계속 흉만 보던 재혼한 현재 부인인 ‘말라’에게도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자신의 기억을 아들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힘겨워 하는 보이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렇게 전쟁 후 현재로 돌아와 살아가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는 끊임없이 곳곳에서 생을 마감한 친척들, 동료들, 친구들을 잃은 아픔과 자신의 고통이 뒤섞인 채 살아가야만 했다. 모두가 다 블라덱처럼 괴팍한 괴짜 노인이 된 건 아니지만 그들에겐 편히 털어놓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곳에서 자신만이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런 죄책감이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채로 평생을 살아온 그들의 묘사에 마음이 나도 먹먹해지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