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질의 밤

빗속에서 다시 심는 씨앗

by 판타

칠흑 같은 어둠 속, 밭두렁에 선 농부가 비명을 질렀다.

농부가 내려다보는 밭 위에는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사내들이 조용히 삽질하고 있다.

그믐달 어스름한 달빛에만 의지한 채, 손전등 하나 없이 땅을 파고 있는 사내들.

사색이 된 농부를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들의 무자비한 삽 끝이 흙 속에 묻힌 작물에 생채기를 낼 때마다 나는 물기에 젖은 곡소리.

농부가 이내 달려들었지만, 고단한 일로 이미 지쳐버린 몸으로는 건장한 사내들을 이길 수 없었다.

농부를 밭두렁에 묶어두고 작물을 함부로 뽑아내는 사내들.

한 해 농사가 허망하게 망쳐지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며 농부는 눈물을 흘리며 발버둥 쳤다.


그 피눈물이 자식 같은 작물을 향한 것인지,

곧 다가올 겨울을 고단하게 보낼 자신을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지칠 줄 모르는 농부의 신음은, 사내들에게는 그저 거슬리는 소음일 뿐이었다.


이제 뭐든 상관없다는 듯 그들의 수레에 닥치는 대로 퍼 날랐다.

그 삽질엔 작물과 그 밭을 일군 농부를 향한 어떠한 존중이나 안타까움은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헤드라이트조차 켜지 않은 트럭 한 대가 일꾼들을 싣고 다가왔다.

사내들은 기뻐하며 수레를 끌고 트럭으로 몰려들었다.

아무런 표정 없이 그들을 내려다보는 운전사 앞에서 사내들은 비굴한 웃음을 띠며 수레에서 작물이 아닌 흙을 골라 일꾼에게 건넸다.


일꾼들은 흙을 퍼 나르며, 허기를 달래듯 작물을 집어 한 입씩 베어 문 뒤 나머지는 휙 버렸다.

버려진 부분은 진창 위로 떨어져, 짓이겨지고 퇴비 위에 뒹굴었다.

쓸모 없어진 작물들은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졌고, 그들 중 누구 하나 밭주인을 돌아보지 않았다.


트럭 운전사는 수고했다는 말조차 없이, 돈가방을 툭 던지고 트럭에 올라탔다.

그 모습에 단지 풍경의 일부로 존재하던 농부의 입술에는 소리 대신 피가 흘렀다.

빼앗긴 작물이 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음에 분노하는 농부.

피부가 터지고 피가 흐르면서도 기어이 자신을 묶은 줄을 끊어냈다.


농부의 옆에는 사내들이 쓰다 버린 삽이 놓여있었으나, 그가 집어든 것은 흙이었다.

느릿하고 애처로운 걸음으로 트럭 앞에 선 농부.

사내들이 농부를 막으려 다가왔지만, 피투성이가 된 채 흙을 움켜 쥔 그의 결연한 눈빛에 누구도 삽을 들지 못했다.

그의 조용한 저항 속에서 사내들은 불편한 기색으로 뒷걸음질 치며 사라졌다.


모든 것이 끝나고 무거운 적막이 깔린 밭 위에, 농부는 허망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농부의 애끓는 마음을 대변하듯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이내 굵어진 빗줄기는 농부의 얼굴에 묻은 눈물과 피를 씻어 내린 뒤, 파헤쳐진 밭을 향해 흘러갔다.


도망치던 사내들과 트럭은 모여든 흙탕물에 실려 어디론가 떠내려갔다.

망쳐진 밭은, 묘하게도 다시 본디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아침이 밝아왔다.


눈물을 닦고 사내들의 삽을 던지는 농부.

자신의 삽으로 다시 묵묵히 땅을 파고, 씨앗을 심었다.

망가진 시간, 잃어버린 성과 위에 다시 일어날 자기 자신이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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