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물었다 '괜찮아?'
샤워를 하는데 허벅지 위쪽에 못 보던 상처가 나 있었다. 붉은색과 보라색 점들이 마치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들처럼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며 5센티가량의 타원을 이루고 있었다. 상처의 크기로 봐서는 상처가 날 당시에 꽤 아팠을 것 같은데 도무지 어디에서 어떻게 생긴 상처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벌써 작년이 된 지난 4월 초, 8년 간의 타지 생활을 접고 한국에 온 지 9개월이 되어 간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적응은 잘하고 있냐'라고 묻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는데 이제는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내가 이 곳에 있는 걸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한국에 '생활'을 하러 오기 는 실로 오랜만이라 나는 꽤 들떴던 거 같다. 의욕에 넘쳐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이거 해볼래? 이런 것도 할 수 있어? 하며 주변 사람들이 일을 주면 한 번도 마다하지 않고 해냈다. 그 사이 나는 14명의 다른 고양시민들과 함께 시집을 한 권 냈고 지인의 아끼는 후배를 위해 웨딩 부케도 만들었고 누군가를 만나도 봤고 5개월째 아이들과 미술수업을 하고 있기도 하고 간단한 강의와 북클럽을 진행해 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5년을 함께 한 고양이 이비자를 묻기도 했다.
천주교 세례를 받기도, 수영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하나도 무리한 건 없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아니까 관련 통역, 꽃을 배웠다니 꽃 일, 예술을 하니 아이들 미술 수업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임을 다시금 확인하고 이 모든 걸 맡겨 준 주변 사람들에게 그저 감사했다.
정말 더웠던 어느 여름날, '제도적 교육학'에 관한 세미나 통역을 끝내고 전문 통역도 아닌데 페이도 적당히 받고 아주 유창하진 않았어도 이 정도면 부끄럽진 않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급하게 하나를 더 제안받았다. 전문인들을 대상으로 한 특정 용어들과 철학 이론 세미나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에 단번에 거절했다. 그런데 도저히 다른 사람을 구할 수가 없다며 잘하지 못해도 감안하겠다며 억지로 맡기는 바람에 결국 내가 하게 됐다. 자신이 없었는데 세미나 중에도 여러 번 정신을 붙잡아야 했다. 거의 끝나갈 무렵 강연자가 질의응답은 영어로 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이크를 들고 나에게 먼저 사과했다. 이해한다고도. 그러고 청중들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원래대로 전 날 일정에서 끝냈었으면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웃으며 혜어졌을텐데 무리를 한 바람에 내 탓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고 기분도 찜찜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되어 집에 돌아왔었다.
반면에 (주로 엄마가 가게에 두려고 주문한 부케) 꽃 사진을 몇 장 본 지인이 아끼는 후배의 결혼식 웨딩부케를 선뜻 내게 맡겨 주셨을 때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해 보겠다고 했는데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꽃은 결혼식 이틀 전 새벽 꽃시장에 가서 첫 꽃을 사서 보일러를 틀지 않은 방에 물을 올리느라고 미리 준비해 두었고 부케를 만들기 시작한 건 결혼식 전 날 저녁부터였는데 생각보다 부담감과 긴장감이 엄청났다.
일단 돈을 받고 하는 일이었고 일반 플로리스트가 아닌 내게 맡겼다는 건 그만큼 일반 부케와는 차별화된 예술적인 면을 바라는 거라는 부담이 들었고 그건 무척 추상적인 영역이었다. 못해도 일반 웨딩 부케만큼은 해야 했다. 수많은 겨울 웨딩 부케 사진을 리서치했지만 꽃시장에 가서 골라온 꽃들은 '달라야 한다'는 내 욕심이 가득 들어있는 꽃들 뿐이었다. 그 꽃들을 서로 어울리게 하는 게 내 능력 밖의 일인 것만 같아 패닉이 오기도 하면서.. 결국 새벽 2시에 마음에 드는 작업이 나왔고 아침 7시 배달을 위해 침대에 누웠다. 내 결혼식도 아닌데 왜 이리 긴장이 되는지, 별별 걱정이 다 들었다. 그렇게 한 숨도 이루지 못하고 각성상태 비슷하게 몇 시간을 뒤척거리다 배달을 보내고 마침 이 날 성당에서 피정을 가야 했어서 그 길로 집을 나서 콩나물해장국집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8시 반이 돼서 메이크업받고 계신 신부님에게 문자가 왔다. 이 곳에 온 다른 부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며 너무 마음에 들고 축복받는 기분이라고!
콩나물해장국을 입에 넣고 벅차 올라 눈물까지 찔끔 날 뻔한 걸 애써 꿀컥 삼켰다. 이 작업을 통해 작은 언덕 하나를 넘은 것 같아 뿌듯했고 감사했다.
일적으로는 모두 감사한 일뿐인데 사람 관계, 특히 애정관계에 있어서 나는 여전히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곤란한 상태에서 괴로워하면서도 노력을 계속했다. 좋으면 좋으니까 계속하고 안 좋거나 헷갈릴 때도 일단 계속해보자며 내 마음이나 상황을 제대로 보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그건 내가 삼십여 년을 지내며 봐 온 가장 익숙한 내 성향에 따른 매 순간의 선택이었다.
그러려니 한 건지 내 주변 사람들은 잘 왔다고만했지 어떻게 해서 오게 된 거냐고 묻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이번에는 더 이상 합리화도 시키지 않고 결심한 것을 바로 행동으로 옮겨서 그렇게 4월 초 한국에 오게 되었다.
작년 가을부터 상황은 막막했는데 친구가 선뜻 손을 내밀어줘서 이렇게 인생의 페이지가 넘어가나 싶었다. 내가 계속 프랑스에 남아 있었다면 난 꽃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을 거였다. 그렇게 파리에서 몇 달을 주소 없이 지내다가 좋은 소식으로 다시 낭뜨 근교로 돌아가게 되었고 혼자도 아니었다.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사람들과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2월에는 팔자 좋게 시칠리아도 한 바퀴 돌았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모든 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데에 차질 없이 흘러갔는데 딱 하나, 그와 나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갖고 있었다. 그건 앞으로도 해결이 안 될 거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고 사소하고도 끝없이 반복된 일이 계기가 되어 결국 그만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건 내가 살아온 방식과 맞지 않아, 난 이렇게까지 할 필요를 못 느끼겠어라고 수없이 나의 입장을 설명하고 대변해 왔는데 그 또한 내 고집이고 편협함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난 남들과 달라, 내가 옳고 남들이 틀리다는 건 아니지만 내 나름 지켜온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있다고, 그렇게 오랜 세월 쌓아 올린 그 성 뒤에 항상 숨었던 것 같다. 그건 꼭 지켜내야 할 신념이었다기보다 너무 견고하게 쌓아 올려 나 스스로를 가둬 놓고 관계에 있어 필요할 때마다 변명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몇 번 마음이 쿵하고 떨어졌었다. 그러나 좋은 순간도 많았기에 나는 여전히 관계를 이어갔고 나의 방식을 고수했다. 나를 꽤 잘 아는 친구에게 힘든 마음을 하소연하니 '너는 사람을 대하는 기준이 일반 사람들이랑 많이 다른 것 같아. 남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이해하는 걸 보고 있자면 너의 그 제너러스함이 너무 극단적인 것 같아 보이기도 해. 네가 누군가와의 관계를 끊어내는 게 너의 살아온 방식과 맞지 않는다니 그건 너 알아서 할 문제지만, 한 번쯤은 그래도 돼. 그럴 필요가 있다면'이라는 말을 해 주었고 진심으로 날 걱정해서 해 준 그 말에 내가 쌓아 올린 성에 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전에 해보지 않은 이런 큰 일을 치르고 나서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가는데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너 괜찮아?'라고 내 마음이 목소리를 내서 묻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건 내 대답이었다.
'응 생각보다 괜찮네'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이 글은 허벅지에 나도 모르게 생긴 상처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분명 내 마음에도 어디서 생겼는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이런 크고 작은 생채기가 꽤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예술이라는 영역 안에서 시각적, 문학적 작업을 하며 그것들을 풀어 왔고 그건 내 인생에 있어 무척 필연적인 작업이기도 했다. 그렇게 표현해 온 걸로 족하다면서 내 마음에 귀 기울이는 것을 애써 모른 체하고 살아온 것도 같다.
영어로 how are you? 불어로 ça va? (싸 바?)는 한국어로는 '괜찮아?' '잘 지내?'인데 한국어로 질문을 받으면 으레 잘 지낸다고 대답하고 마는 것 같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교과서적인 'sure' 'fine thanks and you' 정도로 대답하는데 얼마 전 외국어를 교환하는 어플을 통해 처음 만난 프랑스인과 채팅을 하게 됐는데 ça va?라고 묻는 첫마디에 '아니 나 기분 별로야' 라며 그때 당시의 심정을 솔직히 말했고 '왜? 무슨 일인데?'라고 묻는 두 마디에 주절주절 내 상황을 설명하면서 얘기를 이어 나갔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상대가 나를 어떻게 나를 평가할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친한 친구 대하듯 그를 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종종 나에게 물으려 한다. 싸 바?
사진 _2019.1.2 내 생일, 직접 구운 진저쿠키, 서울 한남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