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을 지내며

어린이날에 부모에게 50만 원을 요구하는 어른이라니

by 환희

1 이사를 했다. 6년을 살았던 낭뜨를 처음으로 떠나 앙제로 왔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곳에 바티와 나 퐁퐁과 이비자 넷이 와서 지금은 바티 나 이비자뿐이다. 낭뜨에서 6년을 함께 했던 토끼 퐁퐁을 잃었다.


2 수두를 앓았다. 하필 꽃 학교를 다니며 처음 꽃집에서 인턴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 4시간에 한 번 먹는 진통제 없인 못 견딜 만큼 고통스러운 치통을 생전 처음 겪어봤다. 식탁에 앉아서 바티가 차려주는 밥을 먹다 말고 울기 시작하는 나를 보고 바티는 '왜 그래 무슨 일이야?'라고 놀라 물었다. 나는 문자 그대로 너무 아파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눈물이 그냥 난다고 대답했었다. 머리가 조여 오고 정확한 부위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얼굴 전체가 아팠다. 머리 아파하며 잠에 들었고 아침에 눈을 뜸과 동시에 단 몇 초의 여유도 주지 않고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아무런 통증 없이 잠에서 깼던 아침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고 너무 그리웠다. 치통이 치료된 다음 날 밤새 온몸에서 열이 났다. 다음날 아침, 열은 식었지만 옆구리에 뭔지 모를 수포가 몇 개 올라와 있었고 난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내게 치통 때문에 강한 진통제를 처방해줬던 의사에게 몸에 이런 게 낫다고 전화를 하니 항생제 부작용일 수도 있다며 얼른 약속을 잡아주었다. 이때 처음, 두려움을 느끼고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 오후, 동창들과 축구를 하고 왁자지껄하게 점심을 드시고 있는 아빠한테 전화해서 '내 몸이 이상해'라며 꺽꺽 울었다. 아빠는 침착하게 타일렀다. '그러니까 평소에 운동 좀 하고 관리 좀 하라니까, 별 일 아닐 거야. 얼른 병원 가봐' 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했고 핀잔을 들을 당시에는 '아파 죽겠는데 그 와중에도 운동 안 했다고 타박이네' 하며 섭섭해했지만 그 덕에 불안한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던 것 같다. 지난주에 내가 탄 버스에 현장학습 다녀온 아이들이 여럿 탔었다. 그때 수두가 옮은 것 같다, 고 의사와 결론 내렸다. 수두는 전염병인 데다가 특히 임산부한테는 치명적이라서 나을 동안 꽃집에서 일하는 건 안된대서 꽃집 사장한테 전화해서 며칠 더 쉬어야겠다고 얘기하며 죄송하고 왜 하필 중요한 이때에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억울해서 또 울었다.

하루, 이틀 지날수록 몸통에서 팔, 다리, 목으로 퍼져 수십 개로 늘어나는 수포 하나하나에 2가지 연고를 매일 같이 발라주는 바티를 가만히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그냥 옆에 있으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느낌으로 내 무너진 일상을 챙겨 주었었다. 엄마는 내 이마에 딱 하나 남은 수두자국을 찍은 사진을 보고선 '수두는 꼭 몸 어딘가에 자국 하나를 남긴다는 얘기가 있어. 나도 이마에 하나 있어 너랑 비슷하게'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3 왼쪽 눈동자 바로 밑에 작은 점이 생겼다. 얼마 간은 색이 진하지 않았어서 뭐가 묻은 줄 알고 눈을 비볐었다. 어느새 보니 색이 진해지고 그 자리에 눌러앉은 점이 되었다. 눈가에 생기는 점은 눈물점이라던데 그러고 보니 올해 꽤 많이 울었다.


4 두 개의 졸업장을 얻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 건 여전하다.


5 가장 친한 친구 둘이 결혼을 한다. 둘 다 young 했을 때 같이 뛰놀던 친구들이라 언제까지고 큭큭대고 자유롭게 만날 줄 알았는데 이젠 그들의 '남편'과 '아이'를 소개받는다니, 축하하면서도 어색하다. 결혼을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막연하게 바라고 그려보지만 아직 나와는 동 떨어진 이야기 같다.


6 석사 졸업을 (간신히) 하고 나는 이 곳 프랑스에서 앞으로 계속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이 사회에서 경계인이 아닌 구성원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종종 '너는 왜 그렇게 여기 있으려는 거야? 너는 어떤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거야?'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버티는 삶이었으면 진작에 한국에 돌아갔을 거랬다. 나한테는 졸업을 하고 여기서 지내는 게 너무나 당연했고 자연스러웠고 더 이상 학생이 아니기에 비자 문제에 관한 정당한 방법을 찾아야만 했을 뿐이다. 이 곳이 내가 발 붙이고 생활하는 내 터전, 내 집이라서 당연하기도 했다.




왜 하필 서른 직전의 스물아홉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집착 아닌 집착을 하고 대단한 시기를 지나는 것처럼 굴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그 나이가 되니, 굳이 스물아홉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이 정도 살고 보니 자연스레 내 삶을 돌아보고 있었다. 사회에서의 신분이 더 이상 학생이 아니게 되는 시기가 하필 지금이어서 인지도 모른다. 이제까지는 되는 대로 흘러만 왔다면 요즘엔 문득 멈춰서 나는 어디쯤 와 있는가를 가늠해 보려 한다. 또 신기하게도 인터넷 상에서 접하는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 꽃 학교에서 만난 동양인 친구들이 모두 나와 같은 스물아홉이라는 거다. 나에게뿐만 아니라 스물아홉을 지나는 모두에게 변화의 시기이고 동시에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것도 심심찮게 보인다. 각자의 결의를 다져보는 거겠지.


철이 들었다거나 어떤 대단한 이치를 깨달은 것은 전혀 아니지만 한 가지 알겠는 것은, 사람은 하루하루 어떻게든 살면 살아진다는 거다. 중요한 것은 살아지지 않고 어떻게 내가 나로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어려서부터 우리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나를 친구나 친척들과 비교한 적이 없으시다. 일이 바쁘고 사는데 여유가 없어서인 이유도 있지만 나를 아주 잘 키워보겠다는, 대단한 사람을 만들겠다는 욕심도 부리지 않으셨고 다만 항상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내게 어릴 때부터 책과 디즈니 영어 비디오를 사주 셨었다. 매일 톡을 하고 전화를 하는 쪽이 항상 나라서 '정말 너무 하다 섭섭해!' 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지만, 방관에 가까우나 잘못된 건 매를 들어서라도 제대로 된 사고를 심어 주신 부모님의 교육관에 감사함을 느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같이 살며 나를 돌봐 주셨던 할머니의 꽁짓돈을 몇 번 훔친 일이 있었다. 동네 문방구에서 본 3단 전자 필통이 너무나 갖고 싶었고 할머니가 내 앞에서 돈을 꺼내 따로 보관하는 서랍에 두시는 걸 본 게 생각이 나 결국 3번 정도에 걸쳐 돈을 모아 그 비싼 필통을 사서 책상 밑에 숨겼었다. 할머니는 범인이 나인걸 아시면서도 처음 몇 번은 눈감아 주시다가 아빠에게 말했고 아빠는 당장에 매를 드셨다. 필통은 사놓기만 하고 비닐 포장도 안 뜯고 있던 것을 엄마와 같이 문방구에 가서 사정을 말하고 반품했다. 그 후로 나는 살면서 맹세코 한 번도 남의 것에 손댄 적이 없다. 아빠가 그때에 아주 호되게 그리고 단호하게 가르쳐 준 덕이다. 반면 중학교 때 내가 코를 뚫고 싶다고 한 것은 내 주장을 충분히 들어주시고 허락해 주셨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아니었고 대신 그에 따른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고 하셨었다. 또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레게머리를 하고 싶어 했던 것도 편지와 말로 설득하고 허락을 받아냈었다. 초등학생 때, 하루는 나를 동네 중국집에 데려가셨었다. 간만의 가족 외식에 신이 나서 열심히 자장면을 먹는 내게 부모님께서 물었다. '너 저기 미국 가서 공부해 볼래?'라고. 나는 대뜸 '뽀미는?' 하고 우리 집에서 키우던 내 동생이나 다름없던 강아지 이름을 댔다. '두고 가야지 너 혼자 가게 될 거야' 래서 나는 우물우물 고민을 하다가 '그냥 여기 있겠다'라고 했고 그 사안은 그렇게 결정이 났었다. 어릴 때부터 아빠와 엄마, 외할머니까지 나를 '아이'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 주셨고 부모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아빠 엄마도 부모이기 이전에 사람이고 나 또한 그렇다는 생각을, 그래서 각자가 각자의 삶에 책임감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참 많이 듣고 자랐었다.


우리 집에선 한 번도 '네가 이런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런 진로는 어떻니'라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 매일 옆에서 케어해 주시진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뭔가 상의하고 싶을 때는 정말 열린 마음으로 들어주셨던 것 같다. '안 돼'라는 말을 한 번도 듣지 않고 자랐었는데 대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 들어야 하는 수업을 듣기보다 도서관과 시청각 비디오실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다가 오는 학교 생활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생각에 부모님께 학교를 그만 다니겠다고 했었다. 그 지난해에 3 지망으로 넣은 지방대에 붙어 기숙사까지 신청해놓고 수업을 일주일 정도 들어보고, 전날 밤에 나이트에 다녀와서 술이 덜 깬 동급생들과 2번째 수업시간에도 썰이나 풀고 수업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담임교수를 보고 나서 일주일 만에 학교를 관둔 전적이 있는 나였다. 내가 더 열심히 해서 좀 더 나은 대학을 가겠다는 말을 믿어 주셨고 다음 해에 운 좋게도 손에 꼽히는 명문대에 들어갔었다. 1학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 전공 교수님의 전시를 본 지 얼마 안 되어서 그 교수님과의 그룹 면담이 있었다. 뭣도 모르는 내가 봐도 너무나 멋진 작업들이었어서 전시에 관해 무슨 얘길 할지 설레 하며 자리에 앉았는데 그분은 내게 '너 그렇게 숫기 없어서 어떻게 할래'로 시작한 사회생활에 대한 조언, 아무쪼록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만 듣고 나와서 마음에 큰 실망을 안고 나와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때 처음 아빠는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셨고 그래도 1년 더 다녀보고 그래도 아니면 그때는 관둬도 아무 말 안 하겠다 하셨다. 내가 맛만 보고 발만 살짝 담근 대학생활에 대해 그렇게 빨리 결정을 내리는 것에 대해 걱정하시며 이번엔 아빠가 나를 설득했고 나는 오케이 했었다.


몇 년 전에 한 번 물어본 적이 있다. '아빠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라고. 역시나 진로를 고민하던 때라 그 안에는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빠는 '멋진 여성'이라고 대답했다. 엄마 역시 그랬다. 어쩌면 엄마 아빠가 말한 '멋진 여성'은 교수되기보다 더 힘들지도 모른다. '멋진 여성'은 내가 보여지는 모습이나 직업보다 내면이 정말 멋져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얼 하는지를 알고, 무엇이 옳은지 알고 행하는 사람이며 멈춰있지 않고 항상 나아가는 사람이다.


요즘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생각한다. 엄마 아빠의 바람대로, 나 스스로 만족하고 부끄럼 없게 내가 정해놓은 기준들을 지키며 사는데 생계도 유지할 만큼의 돈도 벌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7 막달 학비를 내고 나니 통장이 마이너스가 되었다. 그래서 엄마와 아빠 모두에게 무리해서 생활비 500유로를 더 보내달라고 했다. 하필 5월 5일 어린이날, 스물아홉이나 돼서 부모에게 50만 원을 요구하고 있는 꼴이라니. 한심하고 죄송해서 아마 처음으로 '미안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러곤 아주 펑펑 울었다. 카톡창에 찍힌 저 세 글자를 보고 같이 눈물짓고 있을 엄마 모습이 그려졌다. 마음을 가다듬고 '무리하진 말고. 당장은 해결했고 당장 저 돈 없다고 굶어 죽진 않으니까'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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