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담근 김치가 비로소 간도 적당하고 잘 익은 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4월 7일은 쉴 틈 없이 다녔던 꽃 학교의 최종 시험날이었다. 일반 꽃집과 똑같이 꾸며놓은 공간에서 손님으로 가장한 선생님을 상대로 꽃 판매를 하는 30분 간의 구두시험이 있는 날, 유난히 따듯했던지라 콧노래를 절로 흥얼거리며 새로 산 얇은 흰 셔츠의 주름을 펴서 입고 갔었다.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 아빠한테 카톡을 보냈다. 이번 달 생활비를 부탁하며 은행에 가 줄 수 있냐고. 내 차례가 되었고 시험장인 '가게' 안에 들어가서 선생님과 인사를 나눴다. 선생님은 아까부터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며 5분 후에 시작해도 괜찮겠냐고 물었고 난 '그럼요'라고 했고 혼자 가게에 남겨졌다. 가게 안을 둘러보며 꽃들의 종류와 가격을 외우고 있는 그때에 가죽자켓 주머니 안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꺼냈고 검은 화면 위에 아빠에게서 온 '할머니 방금 돌아가셨다'라는 카톡 메세지가 2초 정도 떠 있었다. 핸드폰을 그대로 집어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돌아왔고 '자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랬다. 구두시험은 비교적 매끄럽게 진행되었고 30분은 금방 지나갔다. 그 길로 집에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아빠에게 보이스톡을 눌렀다가 2초도 안 돼서 취소를 눌렀다. 아무리 내 아빠여도 방금 어머니를 잃은 한 남자에게 감히 무슨 말을 건넬 수 있을지를 모르겠어서였다. 대신 '좋은 데 가셨을 거야'라는 톡을 보냈다. 보내 놓고 너무 진부하고 가벼워 보여서 후회했다. 그 위에 동문서답처럼 내가 보내 놓은 '은행 가줄 수 있어?'라는 문장이 야속하기만 했다. 지난주에 할머니의 상태가 많이 악화돼서 친척들끼리 모여 회의를 했다고 엄마에게 전해 들었었다. 할머니의 운명은 예견되어 있었고 모두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한 치의 빗나감도 없이 그로부터 일주일째 되던 날 돌아가셨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걷는 길엔 벚꽃이 만개해 은은한 꽃향기를 풍겼다. 유난히도 추웠던 지난겨울 덕에 길가 어디에 눈을 두나 꽃이 피어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 이렇게 꽃이 만개한 따듯한 봄날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날 저녁 얼마 전에 담근 김치를 냉장고에서 꺼내 덜었다. 유학 생활이 익숙해지고 여유도 생길 즈음부터 김치를 담갔었다. 세 번에 한 번은 먹을만할 정도로 담가졌었다. 매번 소금물에 반나절을 절이고 과일도 갈아 넣고 새우젓이니 액젓이니 풀까지 쒀서 똑같이 담근다고 담근 건데 결과는 매번 달랐다. 얼마 전 음식을 잘 하시는 어른 집에서 김치를 얻어먹으며 비법을 여쭈니 '풀 같은 거 쑤지 말어, 그런 건 빨리 익혀야만 되는 장사하는 가게에서나 쓰는 거야, 절이는 소금을 좋은 걸 써야 해'라는 간단한 비법을 전수받고 매번 하던 거에서 풀을 쑤지 않고 좋은 굵은소금으로 절여 김치를 담갔는데 이제까지 중 가장 맛있고 알맞게 담가졌더랬다. 저녁상에 김치를 올리며 순간 속으로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이 김치를 먹을 생각에 이렇게 들떠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최근에 두 번째로 옮긴 요양원에서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아직 정신이 멀쩡하실 때에 아빠에게 '나 늙으면 절대로 병원에 입원시켜 수명 연장하지 말라'라고 미리 당부를 하셨다고 한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건 재작년 한국을 찾았을 때 들렀던 성당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에서였다. 할머니를 뵈러 가는 길에 돌아가신 셋째 큰아빠의 납골당에 들러서 인사를 올렸다. 15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당신의 셋째 아들이 안치되어 있었지만 할머니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꺼림칙했다. 가족 일에 관련해 이제 더 이상 결정권도 없고 정신도 오락가락한 할머니이기에 집안 어른들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셔봤자,라는 판단 혹은 핑계로 굳이 알리려 들지 않았다. 그 납골당에서 할머니의 요양원까지 네비를 찍고 '봐 가까워'라는 별 것 아닌 아빠의 말이 너무나 이상하게 들렸다.
자식들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더 많았던 할머니는 그 날 나를 알아보셨다. 아니 나만 기억하셨다. 같이 온 사람 ㅡ눈도 못 마주치시던 푸른 눈의 내 남자친구ㅡ 은 결혼할 사람이냐고 몇 번을 물으셨다. 할머니는 아빠가 묻는 '나 누구야'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거나 모른다고 하셨다. 아빠는 끈질기게 반복했다. '막내아들이지' 하면 할머니는 아빠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다른 아들 이름을 댔다. 그 셋째 아들이 서너 살 때에 죽지 않았더라면 아빠는 칠 남매 중의 막내가 됐을 텐데. 치매란 것은 참 알 수 없다. 모든 기억을 다 지워가는 줄로만 알았더니 할머니의 마음 저 깊은 곳에 있던 그 죽은 아들의 이름을 불러다가 시간만 나면 할머니를 문병 오는 막내아들인 아빠에게 덮어 씌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같이 온 아빠의 여자가 있었다. 아빠 집에서 저녁상을 차려 주면서 내게 부끄러움인지 수줍음인지를 보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아주머니. 그 아주머니는 안되는 걸 알면서도 그 여름, 잘 익은 토마토를 수녀님 몰래 한 알 서리해와서 할머니 손에 쥐어주었다. 할머니는 그 여자를 아빠를 보는 눈빛과 같은 눈빛으로 잠깐 쳐다보고 말았다. 그이가 준 토마토를 보행기 같은 휠체어에서 만지작 만지작 거리고만 계셨다. 아는 언니의 한 살 반 된 아기를 봐주다가 귤을 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갓난아이 일 때부터 봐 왔던 아이라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귤을 열심히 까서 입에 넣어 오물오물 대는 모습을 대견하게 지켜봤었다. 할머니는 더 이상 토마토를 한 입 베어 물 힘도, 어쩌면 그게 토마토라는 것조차도 모르시는 것 같았다.
엄마는 그 여자가 같이 동행한 사실을 알고 더 이상 할머니를 찾아뵈러 가지 않겠다고 했다. 엄마에게 가슴 아플 일이 또 남아 있었다. 새삼스럽게. 그러니까 정작 할머니는 기억도 못하고 누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해도 그 시설의 할머니를 제외한 모두는 아빠와 동행한 그 여자를 똑똑히 기억할 테니, 그걸 못 견디는 이유에서라고 나는 짐작했다.
프랑스에 다시 돌아와서 나눈 전화 통화에서 아빠는 할머니 상태가 호전됐다며 아빠도 알아본다고 했다. 내가 기억하기론 할머니는 아빠'만' 못 알아봤었다. 아빠는 펄쩍 뛰며 '그때 아빠만 못 알아봤던 게 아니고 아빠도 알아보지 못하는 날이면 다 못 알아봤지' 랬다.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 '어머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의 새 여자이자 예전에도 만났던 여자였다. 그 당시 엄마의 입을 통해 듣는 아빠와 그 여자의 얘기는 동네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아글쎄'로 퍼져 나가는 혹은 티비에서 숱하게 봐 오던 얘기라 오히려 현실감이 없게 들렸다. 그 진부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 아빠가 될 거라고는, 해서 나는 '왜?' '어떻게?'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었다. 나는 지금도 저 얘기들을 반만 믿고 산다. 저 여자는 할머니가 남은 생에서 새로 알게 된 마지막 사람일 거다. 아빠와 혜어질 때 내가 키우던 개를 달라고 해서 데려간 후 사료 대신 생고기를 직접 갈아 만든 생식만을 먹였듯, 이제까지 가져본 적 없는 '어머니'에게 유별나게 정성 들여 준비한 음식들을 떠 먹이고 있었다. 엄마가 알면 좀 못마땅해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정하실 때의 할머니는 항상 당신의 아들들이 옳고 며느리들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고 거침없이 저런 생각을 말과 행동에 옮기셨었다. 그런데 저 여자는 더 이상 썽도 낼 줄 모르고 고집도 피우지 않는 무력한 노인네와 '어머니'놀이를 하고 있었다. 너무 거저먹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할머니가 저 여자만은 기억하지도, 알아보지도 못했음 했다. 설사 저 여자가 우리 가족 전부를 통틀어 지금 가장 자주 할머니를 보러 가는 사람이래도, 건강하고 좋은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 입에 넣어주는 유일한 사람일지라도 저 여자 대신 엄마를 알아보았으면 좋겠다.
재작년 할머니를 요양원의 2층 거실에 모셔놓고 나오려는데 그 날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고 먼 곳만 바라보시던 할머니가 일어나려는 내 팔을 붙잡고 '너 이렇게 말라서 어디 되겠냐' 하셔서 정말 깜짝 놀랐었다. 근육이 다 빠져나가 뼈만 앙상히 드러난 당신의 다리를 가리키며 '내 다리랑 같아서야 되겠냐'라고 하셔서 '저 밥 많이 먹어요 걱정 마세요'라고 하고 나왔었다.
생전에 할머니가 아직 휠체어에 앉아 계시기 전에 아빠는 자꾸 휠체어를 찾는 할머니에게 '노인네들 한 번 휠체어에 앉으면 순식간에 근육이 빠져나가 그 후론 한 걸음도 못 뗀다'며 하루에 10분이라도 지지대를 붙잡고 복도를 왔다 갔다 하시게 했다. 내가 몇 년에 한 번 할머니를 찾아 뵐 때마다 아빠는 '엄마 환희 결혼하는 거 보러 저 멀리 외국에 비행기 타고 가려면 운동 열심히 해놔야지만 갈 수 있어'라며 할머니를 걷게 하셨고 그때마다 할머니는 '내가 가야지 비행기 한 번은 타봐야지' 하고 결의를 가지고 말씀하셨었다. 치매 증상으로 할머니는 이불 밑에 천 원짜리 수십 장을 숨겨두고 틈만 나면 그 돈이 잘 있는지 세고 또 세셨다. 아빠는 '비행기 그거 비싸다며 돈 많이 모아 두라'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뵈었던 그 날, 결혼할 사람이냐고 자꾸 물으셔서 내가 '아직 몰라요'랬더니 '그래도 너 결혼하면 내가 가야지'라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 하시는 한마디에, 당장 내일모레 결혼을 한대도 할머니가 비행기를 타고 올 일은 절대 일어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기에 울음이 터졌었다.
할머니의 연세가 많을 거라 짐작은 했는데 엄마에게 물으니 93세란다. 내가 이만큼 커서 내가 담근 김치가 비로소 간도 적당하고 잘 익은 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