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침묵 휴가

장마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휴가 계획 변경에서 깨달은 것

by 환희

지난주, 태풍이 소리 소문 없이 지나갔다는 데에 나는 심히 미심쩍어했다. 아니나 다를까 찜찜한 기분은 항상 맞아떨어지듯 장마가 시작되었다. 나와 h는 스노클링 장비들을 하나씩 주문해서 바캉스를 준비하고 있었고 내일부터 시작해 월요일 오전까지 이어질 우리의 바캉스 날짜와 장소에 딱 맞춰 내릴 비 소식에 난감해하는 중이다.

바캉스 시즌인지라 어딜 가나 숙박은 1박에 십오만 원을 웃돌았고 그럴 바엔 차라리 해외 패키지를 다녀오는 게 나을 정도여서 '왜 꼭 그 웃돈과 교통체증을 견디면서까지 휴가를 가야 하나?' 하며 힘 빠져 있던 찰나에

우리의 휴가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워 둔 아빠의 카라반이 생각났다. 숙박만 해결돼도 많은 돈이 절약됐기에 아빠의 허락을 받아 다시 휴가를 떠나는 걸로 굳혀졌다. 그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와도 나름 낭만적이지, 하며 카라반에 틀어박혀 종일 영화와 책 리스트를 작성하려는데 어제 아빠와의 통화에서 전기 연결은 아빠가 해주지 않으면 복잡해서 안된다며 정말 '잠만 자'는 게 가능한 상황이랐다. 내부 배터리로 전등은 켜지고 헨드폰 충전 정도는 가능할 거고 가스를 쓸 순 있으니 라면 끓여먹는 거 정도는 가능한데 햇반 덥힐 전자레인지나 냉장고도 가동이 안되니 매 끼니 사 먹을 거냐며 걱정을 비추셨다. 화장실과 샤워실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러 가나,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오늘 아침, 여름마다 아빠의 카라반에서 며칠씩 지내다 온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마주하는 게 초록의 자연이고 밤에는 여름에도 서늘한 그곳에 피운 불 주변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불이 꺼질 때까지 쳐다보다가 자기 전 하늘을 쓱 한 번 올려다보면 보이는 빼곡한 별들과 함께 잠들었던 순간들. 그 풍경과 여유가 떠오르니 비가 와도, 전기가 없다고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멋진 곳을 가고 뭔가를 해서 좋았던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러다 보니 세상과 완벽하게 차단되었던 항해 유람의 단상이 떠올랐다. 전화조차 터지지 않고 물과 음식을 비축해서 매 끼니 간단한 요리를 해 먹고 책을 읽거나 대화를 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친구들에게 보낼 엽서를 끄적거리고 너무 더우면 물에 들어가 배 주위를 엉성하게 헤엄치며 떠 있었다.

이번 휴가는 6미터짜리 좁은 배에 비하면 엄청나게 아늑한 카라반인데도 불구하고 '불편'을 핑계 삼아 가지 않을 구실을 찾고 있었다니.



최근에 내가 스마트폰(인터넷) 중독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인스타를 열심히 기웃거리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세상의 재미있는 일들과 장소들, 작업들, 사람들이 있는 동시에 나의 취향을 간파한 쇼핑 사이트들과 궁금해서 클릭해 보게 되는 광고와 영상들에 뺏기는 무수한 시간들은 양날의 칼이자 요즘 나의 가장 큰 딜레마다.


그래서 든 생각이 이번 휴가 때 일정 시간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려 한다. 세상과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으려 항상 안달 나 있는 쪽은 나인데 내 쪽에서 우위를 차지해보려 한다. 집 근처에서 뭔가를 먹으려 해도 '맛집'이 자동반사적으로 나와 검색을 해서 가게 되는데 그 또한 잠시 꺼두려고 한다. 이십 대 초반에 이런 작은 시도, 실험들을 훨씬 대담하게 했었다. 일정기간 동안 미용실 가지 않기, 브랜드 커피 사 마시지 않기 등.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닌 나의 몸을 우선으로 생각하거나 내가 믿는 가치관을 더욱 확고하게 해 보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요즘은 '휩쓸리지 않기'가 내 삶에서 가장 큰 화두이다. 며칠이고 다양한 것들에 휩쓸려 지내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별 의미 없이 뭘 했는지 중요하지도 않고 생각나지도 않는 날들이 순식간에 지나가 있다. 섬뜩한 일이다.

자기 계발서 책은 사본 적이 없는데 최근에 사서 읽는 책 중에 <메이크 타임> 이 있다. 이런 책을 사다니 내가 꽤 절박한 상황에 처한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서 말한 '하이라이트' 개념을 흥미롭게 읽고 있는데 할 일 목록과 (장기적)목표 사이에 위치한 이 하이라이트는 긴급하게 처리해야 하고 내게 만족감을 주고 의미까지 있는 일을 정해서 그날그날 '오늘 가장 빛났으면 하는 순간(=일)'을 정하고 해내고 하루를 마칠 때 그것에 대해 간단히 기록하고 돌아보는 일이다.


작지만 확실하게

이전 07화정답이 없는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