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이 없는 사회

by 환희

유학할 당시 몇 달에 한 번씩 오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택배 상자엔 몸과 정신을 살찌우게 할 일용할 양식 -한국 음식과 한국 책이 들어 있었다. 나의 부모는 다른 것도 아닌 책이라니 군말 않고 그 무거운 책들을 매번 보내주셨는데 이사할 때가 돼서야 그렇게 야금야금 받아 온 책의 무게를 실감하고선 이사를 도와주는 친구들에게 미안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받은 가장 무거운 책 중 하나가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다. 그 책은 책꽂이 가장 밑 칸이자 침대맡에서 손 뻗으면 가장 가까운 칸에 꽂혀 종종 바이블을 대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의 세계관이 퍽 내 맘에 들었었다. 번호가 붙여진, 짧게는 몇 줄로 이루어진 구절들을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고 있자면 당시 종교가 없던 내게 좀 이상한 방식으로 마음의 위안을 줬었다. "그래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존재군 나만 이런 게 아니었어"라고 어렴풋이 느끼고 허한 마음을 쓸어내렸던 것 같다. 후에 <니체의 말>이라는 니체의 명언만 모아 놓은 일본 사람이 쓴 책도 샀었는데 그건 영 와 닿지 않았다. 그렇게 난 니체에게 무척 끌렸지만 흠모의 대상으로 둘 뿐 더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지냈었다. 그러다 최근에 니체의 영원회귀에 관한 짧은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웬만한 한국인들이 아는 서양철학자와 그들이 남긴 말 베스트 오브 쓰리 중 하나가 니체의 "신은 죽었다"인데 그게 정확히 뜻하는 게 정답이 없는 사회란다. 즉 중세시대나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절의 절대신(이때의 신은 종교에서의 절대자=GOD)이 없고 각자가 맞다고 여기는 신들만이 있게 되었다는 거다. 진리나 사실이 없고 각자의 해석만이 존재하게 된 세상. 난 왜인지 슬펐다.

이제는 내가 추구하고 믿는 것들, 그게 물질이 되었던 어떤 대상이 되었던 그 자체를 신처럼 떠받들게 되었다는 사실이, 정답이 없는 사회 이면에 뭐든 정답이 될 수 있고 심지어 그 정답은 유동하는 사회 안에서 오늘 확실하고 타당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내일은 전혀 쓸 데 없고 괴상하거나 유감스러운 실수처럼 보일 수도 있게 되었다는(인용: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지그문트 바우만) 얘기로 들려서 슬펐다. 끊임없이 표류하고 휩쓸리는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렇기에 우리 자신들도 끊임없이 변화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최근 유행하는 단어 flexible이 암시하듯이 유연한 존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인용: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지그문트 바우만)


사회생활을 하는 친구를 만났다. 회사 생활 경험이 없는 내게 7년 차 회사원인 그녀는 조직생활 전반에 대해 '결국 유연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고 했다. 그리고 '페르소나를 가져야 한다'라고도.

조직에 속하고 맡은 일을 할 때의 나와 실제 성격의 나를 분리해야 한단다. 그래서 평소의 나라면 불편해서 하지 못할 언행들을 거래처를 상대하다 보면, 내가 내 일을 수월하게 끝내려면 종종 해야 할 때가 있고 그걸 잘 분리시켜야 실제의 내가 상처를 덜 받는다는 것이다. 반면 사회 초년생일 때는 윗사람이 하는 잘못된 언행들에 대해 가졌던 날 선 예민함이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무뎌지는 것 같아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을 한다고도 했다. 나는 잘은 모르지만 무뎌졌다는 걸 인식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 한 번이라도 나를 돌아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사회생활에서 얻은 노하우를 장착한 건강한 직장인의 모습이 아닐까 했다. 이 친구의 얘기를 들으며 최근 만났던 다른 친구가 떠올랐다.

윗사람과 마찰이 계속되고 겉으로는 할 말은 꼭 해야 하는 사람으로 비치지만 속으로는 매번 상처를 받아 왔던지라 결국 집 근처 심리상담소를 찾아보게 됐다는 친구의 말에 크게 놀랐었다. 그 친구가 들려준 몇몇 에피소드들을 보면 윗사람에게 대들듯 따져 물은 게 아니라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 부족에 대한 부연설명을 요구했다거나 사무실이 너무 추워 난방을 틀어 달라고 요구한 것 등의 매우 사사롭고 정당한 일들이었다. 이 친구는 궁금한 게 있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말하는 호기심이 많고 털털한 성격을 가졌다. 그런데 이 사무실에서 이 친구는 그야말로 순종적이지 않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군말 않고 해 왔던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튀는 사람이 된 것 같고 첫 번째 친구의 지론에 따르면 이 친구가 힘든 건 유연성이 부족하고 페르소나를 만들지 않은 탓이다.

꼭 조직 생활에서 뿐 아니라 프리랜서이던 개인사업을 하던 마찬가지일 거다. 사회에서 강박적으로 유연성을 요구한다. 본래 저 단어는 긍정적인 느낌의, 어디에도 잘 맞게 대응하는 이미지를 연상시키는데 현대에 와서는 꼭 긍정적인 것만을 나타내진 않는 것 같다. 유연성마저도 필수로 갖춰야 하는 덕목이 되었고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족한 사람,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현대사회는 그대로 멈춰 있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게 돼가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점점 밖으로 내몰리고 극단적으로는 부적응자의 이미지까지 갖게 되는 것이다.

조직 생활에서 '나'를 점점 희미하게 만들고 지워서 그 조직이 세운 기준에 어울리는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데서 엄청난 괴리감이 올 것 같다. 그걸 결국 받아들이느냐 못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나는 조직의 안에 있기도, 밖에 있게 되기도 한다. 다만 나의 특성을 내세운 것에 대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가끔 친구들에게 '나 아트테라피 좀 해줘ㅋㅋㅋ'라고 카톡이 온다. '왜? 많이 힘들구나'라고 하면 보통 죽을 맛이라며 '내가 잘못된 건가.. 내가 문제가 있는 듯 내가 사회생활을 너무 어렵게 하는 듯'이라고 결론짓는데 참 씁쓸하다. 남에게 받은 상처를 잘 해결하지 못해 결국 나 자신을 탓하고 마는 그 패턴은 내게도 너무 익숙하고 나도 여전히 나 자신에게만큼은 절대 너그럽지 못하기에 '너한테 너무 그러지 마' 정도의 말을 겨우 꺼낸다.

예술작업이 치료 목적이나 효과를 가지려면 단순한 힐링의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요즘 직장인들을 위한 취미 클래스가 참 많은데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조립장난감의 어덜트 버젼을 보는 것 같다. 찍어낸 듯한 완성작을 마케팅으로 내세워 몇 시간만 투자하면 당신도 이런 퀄리티에 버금가는 작품을 만들 수 있어요의 느낌. 자본주의 사회에서 회사 끝나고 피곤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휴식을 취할 수도 있는 그 시간에 돈을 지불해서 갔는데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활용 가능한 예쁜 무언가를 실패 없이 만들어 집에 가져가는 게 당연하다고 여길 수도있다. 그런 '원데이 클래스'는 시간이 제한적이기에 만들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이고 만들어야 할 견본품이 이미 존재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종류의 뿌듯함은 이내 다른 클래스나 쇼핑 등의 같은 시간을 투자하는 모든 것으로 대체 가능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힐링을 넘어선 트레이닝이다. 이런 활동을 통해 그때그때 지친 마음을 위로받을 순 있겠지만 다음번에도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덜 상처 받고 스스로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게 필요하다. 장르를 불문하고 보편적인 예술작업이라 함은 기본 스킬을 익힌 후에 어떤 작품을 만들어 낼 건지를 스스로 그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멋진 무언가를 설계했다고 해도 그것을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작품으로 실현해내는 과정은 수많은 실패와 좌절 속에서 얻어지는 우연성, 조금씩 나아감을 기본으로 한다. 괜히 창작의 고통이란 말을 하겠는가. 백지를 앞에 두고 뭘 만들어 낼 것인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를 가만히 고민해보고 당황스러움도 느껴보고 그럼에도 계속해 나갈 때에 조금은 부족하고 볼품없어 보일지언정 진짜 '내 작업'이 나오고 그 과정을 대하는 내 태도가 달라짐에 따라 일상에서의 문제에 대처하는 내 태도 또한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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