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의 화장실 두 곳과 주방엔 창이 나 있질 않다. 방1, 방2, 거실에 난 큰 창, 베란다에 난 큰 창으로 보이는 것은 마치 거울에 비춰 보는 것과도 같은 이 집과 똑같이 지어진 집들일 뿐이다. 서로의 시선을 피할 길 없어 나는 모든 버티칼을 내리고 지낸다. 세탁실에 난 작은 세로창을 통해서만 유일하게 시야에 다른 집이 들어오지 않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이 쪽 아파트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건너편 땅이 오랜 시간에 걸쳐 다져지기 시작했고 결국 지난 겨울을 넘기면서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집들이 올라갔다.
집 근처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중 아무도 알지 못하는 건 여전했지만 최근 들어 이 근방에서 단 한번도 본 적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마주치는 일이 늘어갔다. 그들은 분명 나와 같은 마을버스를 탔지만 이방인의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집을 지을 때 입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어도, 말 한마디 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어도 그들은 어느 오후 1박의 짧은 휴가를 얻어 어딘가로 향하는 조금은 들 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각기 다른 팔근육과 밑창이 아주 두터운 작업용 신발과 바지 속으로 집어 넣은 티셔츠 위의 벨트가 그런 것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 이방인의 존재가 두렵다기보다 그들이 어떤 연고도 없고 앞으로도 아마 다시 찾지 않을 이 곳에서, 역시나 살아가며 마주칠 일 없을 사람들을 위한 집을 짓고 있고 철새처럼 또 이동해 나갈 것 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두려웠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들과 나의 연결고리는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나라에서 임대해 주는 그 집들에 들어가 살만한 자격을 갖췄는가를 증명하는 서류와 준비해야 하는 돈이면 됐다니. 그들 집짓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기술, 기능으로만 역할하고 있었다. 그들은 곧 집 짓는 일 그 자체가 되었고 나는 이 집을 지어준 사람들에게 감사하기는 커녕 일정 기간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그들, 가끔 한낮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보면 풀숲에 누워 헬맷을 옆에 두고 낮잠을 즐기기도 하는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 단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여기며 괜히 갈 길을 재촉하게 되었다. 그 뿐이었다.
소외로서의 타자도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의 노동관계는 소외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는 서술할 수 없다.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란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생산물을 낯선 객체로 대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에서도, 자신의 행위에서도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노동자는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할수록 더 빈곤해진다. 그는 자신의 생산물을 박탈당한다. 노동자의 행위는 그의 탈현실화를 초래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삶을 대상 속에 투여한다. 그러나 이제 그의 삶은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라 대상의 것이 된다. 그의 노동의 생산물은 그가 아닌 것이다. 노동관계 속의 소외로 인해 노동자는 자신을 실현할 수 없다. 그의 노동은 지속적인 자기 탈현실화다.(타자의 추방/한병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