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는다는 것

숲에서 갓 딴 버섯을 올리브유에 구워 먹으면 잘 익은 숲고기맛이 난다

by 환희
잃는다는 것에는 사실 전혀 다른 두 의미가 있다. 사물을 잃는 것은 낯익은 것들이 차츰 사라지는 일이지만,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 물체나 사물은 우리 시야에서, 혹은 지식에서, 혹은 소유에서 사라진다. 우리는 팔찌를 잃고, 친구를 잃고, 열쇠를 잃는다. 그래도 자신이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는 여전히 잘 안다. 주변 모든 것이 여전히 낯익지만 딱 그 하나의 항목만, 딱 그 하나의 요소만 없어졌다. 길을 잃을 때는 다르다. 그때는 세상이 우리가 알던 것보다 더 커진 셈이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통제력을 잃는다는 점은 같다.
<길 잃기 안내서> 리베카 솔닛



우연히 들어간 어린이 도서관에서 아침,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가서 어른들이 드문드문 그 자리를 채우고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광경을 봤다. 층만 다를 뿐인데 아침부터 자리 얻기도 치열하고 공부하는 어른들로 가득한 종합자료실과 분위기도 달랐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명당이었다. 거기서 고래의 진화라는 책과 버섯생태도감이란 책을 발견하곤 반가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그러니까 몇 해 전 여름에 나는 내가 본 야생동물이 어떤 종의 돌고래였는지를 식별하고 있었고, 매년 가을비가 온 다음날 이른 아침이면 장화와 주머니칼을 챙겨 버섯을 따러 숲에 가는 나날들을 보냈었다. 벼룩시장에서 산 양장본의 오래된 버섯 도감도 책장에 꽂혀 있었다. 숲이 떠올려지는 표지색과 안의 삽화가 마음에 들어서 샀는데, 종종 독버섯을 구별해 내기 위해 펼쳐 봤었다. 우린 버섯 따는 시기를 매번 너무 빨리 혹은 너무 늦게 갔었어서 버섯을 담을 바구니를 가져갈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름의 작업복이라고 할 만한, 나뭇가지에 긁히지 않을 두터운 자켓과 장화와 주머니칼을 챙기고 매번 숲으로 떠났다. 그 숲들에도 산책로가 나 있긴 했지만 버섯을 따러 가려면 길이 나 있지 않은 곳으로 들어가야 했다. 시야에 걸리고 발에도 걸리는 나뭇가지들을 헤쳐가며 안으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다 멈춰 서면 그 숲엔 오로지 나 혼자였다. 버섯은 빛이 안 들고 축축한 데서 밤새 자라 있기 때문에 내 주변으로는 키가 큰 나무들 뿐이었고 축축하고 어두운 낙엽들 위로 빽빽한 나무 사이를 뚫고 내리쬐는 햇빛 줄기들이 무늬를 만들어냈다.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를 제외하곤 그 고요 속에 멈춰 서서 정신을 집중해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면 정말 신기하게도 그 전엔 보이지 않던 버섯들이 뾱하고 여기저기서 이제 막 솟아난 듯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내 눈에도 잘 띄는 버섯들은 가까이 가서 보면 식용버섯과 닮았지만 사람의 눈을 훨씬 더 잘 잡아끄는 독버섯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먹을 수 있는 귀한 버섯들은 어두운 낙엽색과 똑같고 무수히 쌓인 낙엽의 한 겹 밑에 자리 잡고 있어 이제 막 버섯을 따러 다닌 내 눈으로는 거의 식별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그 식용버섯의 이름을 잊어버렸지만 운 좋게도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한 두 개 따 와선 흙만 털어 올리브유를 두른 후라이팬에 소금과 후추를 쳐서 구운 것을 그 자리에 서서 먹을 때의 맛을 잊지 못한다. 잘 익은 멋진 숲고기맛이라고 할까.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땅만 보고 버섯을 찾다 보면 문득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느 정도까지 깊숙이 들어온 건지, 지금이 몇 시 정도 되었는지에 대한 감각이 흐릿해지는 순간이 온다. 같이 온 사람조차 보이지 않으면 난 두려움에 휩싸여 큰 소리로 일행을 불렀다. 그럼 저 멀리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서 그가 '여기 있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소리가 들렸을 거라고 짐작한 방향으로 걷다 보면 그가 보여 안심을 했었다. 그쯤 되면 내 기준에서는 이만 숲을 떠날 때가 됐다고 여겨졌다. 돌아온 길을 되돌아 나가며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버섯이 있을까 하여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면 우리가 처음 벗어났던 산책로가 나오고 그 길 위에서 오후의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럴 때면 다른 차원의 세상에 있다가 다시금 내가 알고 있는 세상에 복귀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느 가을날 오전에 몇 시간 동안 했던 이 경험들이 작은 모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했고 자주 길을 잃고 헤매었다. 그런 중에 온 몸의 감각들이, 평소엔 쓰지 않고 쓸 필요도 없던 감각들이 깨어나 오로지 하나의 목표, 먹을 수 있는 버섯을 찾아내는 것에 맞춰졌고 운이 좋으면 그것들을 의기양양하게 획득해서 돌아왔고 그렇지 않으면 빈 손이었지만 어딘가로 떠나 탐험을 하고 온 경험만으로도 만족했다. 그곳에선 세상의 지식들이, 인터넷 검색도 아무런 소용 없었다. 그저 여러 번에 걸친 경험에 의해 어두운 낙엽색과 버섯의 머리색을 정확하게 구별해 낼 수 있는 실제적인 눈과 몸의 지각만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느 날엔 하필 우리가 간 숲에 멧돼지 사냥꾼들이 사냥개 수십 마리를 데리고 사냥을 나왔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날 내가 입고 간 점퍼는 하필 동물의 갈색 털을 꼭 닮아 있어서 숲에 들어가야 하나 망설이다가 우리와 경로가 다르다는 말에 약간의 위안을 삼으며 결국 사냥꾼들과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며 저 멀리서 간간이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와 총소리를 들으며 버섯을 찾아다녔던 적도 있다.


나는 이 버섯 따기를 통해 숲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 전엔 내게 있어 숲은 관념 속에서 존재했다면 숲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후로 나는 숲이라는 것을 거의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내가 과연 숲에서 길을 잃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곳에선 처음부터 방향성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막연하지만 굳은 확신 속에 나아갈 뿐이었다. 우리가 지나온 길들과 앞으로 나아갈 길들은 결국 '우리의 길'이 되었다. 이 안에서 '직선코스' '빨리 가는 길' '돌아가는 길'들이 과연 존재할까.

그에 비해 땅에선, 특히나 복잡한 도시에서 나는 종종 길을 잃고 헤매었다. 각각 다른 숫자가 붙어 있는 아파트 단지 내에 들어가면 나는 우리 집을 찾지 못해 7동과 9동 사이를 여러 번 헤맸다.

지도 어플을 켜고 어느 골목에서 꺾어 들어가야 하는지를 도시의 여러 상점 이름, 지표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며 걸었다. 주소만 가지고는 그 어디도 갈 수 없게 되었다.


항해 유람을 할 땐 바람이 잘 불어주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기약 없이 바다 위에 떠 있는 날들이 있었고 이런 최첨단 시대에 살면서 지금 당장 내 힘으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어이없는 실소가 터져 나오기도 했고 두려워도 했지만 결국엔 나아갔다. 반면 도시에선 일분일초가 귀중한 삶에 맞춰져, 제시간에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 지도 어플을 켜고 최단거리를 끊임없이 새로고침하며 자주 뛰었다. 절대로 길을 잃어선 안 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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