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희 Nov 01. 2020

7살 아이도 부모 못지않게 부모 생각을 한다

학원 차가 아이들을 싣고 오면 그만큼의 아이들이 다시 밀물과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유치부 아이들은 뭔가를 시키면 아직 '힘들어요' '팔 아파요' '귀찮아요' 같은 얘기는 안 한다. 그래서 가끔 초등부 수업에 들어가면 요즘 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힘들고 귀찮을까. 유치부와는 전혀 다른 온도 차를 실감하곤 했다. 

하루는 초등 수업을 봐주는데 저학년 여자아이가 '선생니임' 하면서 말을 꺼냈다. 


'저 오늘 10분만 일찍 끝내 주시면 안 돼요? 영어학원 10분 일찍 가서 친구랑 놀고 싶어서요'



이 아이의 하루는 어쩌면 나보다 더 길었다. 학교를 다녀오면 줄줄이 학원을 가야 하고 아마 집에 가서도 그 날의 숙제를 다 마쳐야 끝날지도 모르겠다. 10분 일찍 끝내고 놀이터에 가거나 친구를 만나 원 없이 논댔으면 좀 덜 짠했을까. 요즘 아이들의 고충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나 때는 초등학교 때 그저 롤러브레이드 타고 해 질 때까지 우르르 몰려다닌 기억밖에 없는데. 내 어린 시절은 정말 '라떼는'이 돼 버린 전혀 다른 얘기였다. 


'학원 그렇게 많이 다니는 거 힘들면 하나 정도 줄이면 안 돼?'라고 아이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면 엄마가 좋아하시지 않을 거예요' 


이런 의외의 대답을 하는 아이의 표정을 보고 단순히 학원 하나 관두는 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물론 아이가 너무 힘들다 요구하면 엄마가 들어는 주시겠지만 구태여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걸,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엄마의 복잡한 심정을 헤아려서라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기에 이 아이는 너무 어렸다. 


부모들도 알까. 부모 못지않게 아이들도 부모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이 아이와 엄마의 사랑이 마치 견우와 직녀처럼 한 곳에서 만나지 못하고 어긋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애정과 눈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고작 1시간짜리 미술 수업을 해도 아이들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진 사람이 되는지 느껴지기에 말 한마디, 칭찬 한마디라도 생각 없이 내뱉지 않으려 한다. 고집 있는 아이도 앞에 있는 큰 사람, 어른의 눈치를 보기 마련이다. 이렇게 하면 엄마가 좋아하겠지? 선생님이 내가 이렇게 하는 걸 더 좋아하는 거 같은데? 를 아이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행한다. 그런데 이렇게 어릴 때부터 나의 만족이나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채 알기도 전에 타인의 만족을 신경 쓴다면 아이는 머지않아 지쳐 버리거나 나중에 어른이 돼서도 타인의 시선에 맞춰진 삶을 살아가게 될 거다. 


아이들의 세상은 참으로 단순하다.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여길 이렇게 칠한 이유가 꼭 있을 것만 같은데 막상 물어보면 '그냥요' '이게 좋아서요'가 다다. 혹은 하얗게 놔둔 배경을 조금만 칠해줘도 훨씬 완성돼 보일 텐데 하는 것도 다 어른들의 관점이다. 강요당하지 않은 아이는 꼭 배경색을 다 칠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구나, 이런 그림도 있을 수 있는 거구나를 알게 된다. 흰 종이에 흰색 물감을 써보려는 아이에게 '이건 칠해도 같은 흰색이라 안 보여' 하고 다른 색을 쥐어주는 것과 '같은 흰색이라 안 보일 거야. 하지만 네가 직접 칠해봐. 정말 그런지'라고 하는 건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미 다 겪어봐서, 다 아는 거라서 아이를 위한답시고 하는 말과 행동들이 아이가 직접 뭔가를 느끼고 알아 갈 기회를 빼앗게 될 수도 있다는 걸 항상 인지하고 아이를 대한다면 그 아이의 세상은 좀 더 넓어질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5월 전시에 관한 이민주 님의 비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