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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희 Oct 21. 2020

5월 전시에 관한 이민주 님의 비평

눕거나 서 있는 것들


<당신의 표정이 궁금해요(I long to see your face)> 5.2-5.17 마린아트스페이스


눕거나 서 있는 것들이 보인다. 전시는 검은 매트리스 위로 누워있는 신체들과 싱그럽게 서 있는 식물들로 대조적인 풍경을 이룬다. 박미선, 이환희 2인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서 박미선은 신체를, 이환희는 식물을 주된 이미지의 소재로 사용한다. 이들의 작업은 각자 동물과 식물같이 생물 계의  갈래로 나뉜  하나의 공간을 가르고 있다. 하지만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작업은  체와 식물의 자태로써 서로에게 생기를 부여한다.
먼저, 박미선의 이미지를 더듬어보자. 그의 캔버스에는 표정을   없는 얼굴이 무기력한  위에 붙어있다.  표정 없이 뭉개진, 혹은 지워진 얼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얼굴(face)’이라는 단어는 ‘체면 등치 되면서  사람을 사회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일종의 상징적 의미를  진다. 누군가에게 얼굴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지켜야  체면 혹은 이름이 없다는 것에 다름없다. 말하자면, 얼굴 없는  누군가는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며, 박미선의 이미지는 그러  존재를 가시화하려는 실천이라   있다. 반대편으로 돌아서면, 화분 없는 상태로 뿌리를  감은  벌거벗은 이환희의 식물들이 있다. 이름 없이 놓여 있는 것들은 사람의 손길이 닿으면 움츠러들거나, 벌레를 잡아먹는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동물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마치 ‘식물 인간처럼 운동 기능을 상실한  보이는 박미선의 신체와 달리, 이환희의 풀들은 동물적 생명력을 발산한다.
존재의 차원에서 사람과 식물을 구분하는 특징  하나는, 얼굴, 또는 이름의 문제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바, 사람에게 얼굴이 없다는 것은  사람의 존재와 관련해 치명적이다. 반면, 식물은  식의 영역에서 유형학적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이라는 이름으로  쳐지곤 한다.  지만 이름 없는 식물에 우리는 결코 존재의 의미를 결부시키지 않는다. 매트리스 위로 누워있는 무기력한 식물적 신체와 대별된 동물적 .  표정 없는 얼굴과 이름을 잃은 풀들은, ‘없는’,   ‘지워진상태로 자리한다. 무언가 상실된 채로 있는  작업이 가리키는 ,  없는 형상이 가진 것은 무엇일까? 그러니까 마치 ‘식물인간처럼 운동 기능을 상실한  보이는 박미선의 신체, 동물적인 생기를 가진 이환희의 풀이 그려낸  역설적인 풍경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서둘러 말하자면, 이는 포기되지 않는 욕망의 문제다.
현대 불리는 오늘의 시간과 장소는 과잉된 충동과 대상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내면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한다. 자극된 욕망은 넘쳐나는 대상을, 넘어서는 충동을 감당하도록 요구하며, 우리는 이에  무엇도 잃어버리지 않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응답하길 시도한다. 이런 기형적인 구조에서 사람들은 쉽게 좌표를 잃는다. 좌표를 잃은 이들은 방향을 잃은   자리에 종종 고꾸라진다. 그렇게 주저앉은 신체와 정지된 몸은 욕망에 대한 운동 기능을 상실해 간다. 하지만 박미선과  환희의 작업은  욕망에 대한 부진한 운동에 다른 성질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식물적인 성격 같은 . 박미선의 작업에서 무성한 풀들 위로  낮게 누운 , 한없이 무기력한 몸짓은  육강식의 동물적 욕망과 대별해 식물적 욕망의 이미지를 상상하게 한다. 한편, 전시의 시간을   이환희의 식물들은 동물적 제스처로서 욕망의 기제를 표지 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웠다가 다시 일어나는 풀의 심상을 자아내며(김수영의 <>) 식물의 유연성을 욕망의 자리에 부여한다.  식물적인 욕망은 동물의 세계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장애를 뛰어넘거나, 과잉된 충동을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돌파하거나 전복하는 방식이 아닌, 유약하지만 끝내  위로 올라서는  물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벽을 타고 올라서는  운동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욕망에는 뚜렷한 목적과 방향성이 아닌 부드러운 지향의 의지가 내재한다. 솟아오르는 것들 위에 누워있는 , 누워있는 것들 아래에 일어서는 것을 보고 있다. 이민주(미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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