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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희 Sep 20. 2020

Jake Yuzna <OPEN>

내가 알고 있는 것, 보고 있는 것 그 너머에


낭뜨 살 때 매년 9월에 개최됐던 <Festival des trois continents>이라는 영화제에서 처음 이 영화를 봤다.

삼대륙 영화제라는 뜻으로 프랑스 영화를 제외한 아시아, 아프리카 및 라틴 아메리카의 영화들을 소개하는 게 목적이다.

2014년엔 관객 투표를 포함해 홍상수의 <바람의 언덕>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사실 너무 혼란스럽고 충격적이었어서 <open> 영화가 끝나고 ‘내가 뭘 본거지? 저게 대체 뭐지?’ 싶어서 어두운 복도를 지나 아직 해가 떠 있는 바깥세상에 나와서도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캐나다 아마존 사이트를 통해 디브이디로 소장했었고 귀국할 때 분명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짐을 다 뒤져도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 후로 한참의 시간이 흘러 작년, 코로나 시대 이전에 참석했던 독서모임에서 발제하려고 이 영화의 트레일러나 감독 인터뷰 등을 인터넷에서 다시금 찾아보게 됐다. 이건 그 당시 남긴 노트이다.


제이크 유즈나는 미국 영화감독으로 2010년, 영화 <open>의 각본 및 감독을 맡았다. 이 이야기는 새로운 천년의 새벽에 등장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랑, 섹스, 젠더를 탐구하면서 진정한 퀴어, 트랜스, 열성적인 개인이 출연하는 두 개의 서로 얽힌 러브 스토리를 중심으로 한다, 고 위키피디아에 나와 있다.

내러티브 필름(서사 영화)란 일단 이야기체 중심의 극영화, 가상의 이야기를 극적인 형식으로 전개하거나 시적 영화, 논픽션 영화와 대응하는 장르이다.

표면적으로는 위키피디아에서 말했듯이 러브 스토리지만 그 개인들은 인터섹스, 퀴어 등이다.

내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부분 중 하나는 배우들로 출연한 ‘인터섹스’사람들이었는데 intersex는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전형적이고 이분법적인 ‘규범’에서 벗어난 성별적 특징을 지닌 사람들을 통틀어 이르는 포괄적 용어이며 생물학적 특징을 가리키는 것이지 성 정체성 자체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인터섹스 인권활동가 Kitty Anderson 인터뷰 인용)라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첫 장면은 한 ‘사람’이 자신과 닮은 비슷한 다른 ‘사람’을 휠체어에 태워 수술 후에 퇴원하는 장면이었다.

쌍둥이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똑 닮은 저 둘은 외양은 긴 금발머리에 아주 늘씬한 몸매에 핑크색 치마 정장을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외양으로만 본다면 여성에 가까웠지만 본래 여성으로 태어나진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흔히 ‘저 여자를 좀 봐’ 라거나 ‘저기 지나가는 남자’처럼 특정 성별을 가리켜 그들을 설명하기는 불가능했다.


제이크 유즈나 감독은 문화에 대한 인식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어떻게 문화라는 것이 생겨나고 우리가 그것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 일반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스크린에서 보고 있는 이 영상이 분명 ‘영화’ 임을 가정하고 있는데도 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혼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알고 있는 거의 이분법에 가까웠던 익숙하고 ‘평범한’ 사람을 영화가 끝나기까지 계속 찾고 있었던 거다. 차라리 특수분장을 한 좀비나 몸이 극단적으로 부풀려진 헐크라면 즐기면서 봤을 수 있었을 거다. 저런 존재들은 차라리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 그러니까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 초반에 등장한 이 커플처럼 파트너와 똑같이 얼굴부터 머리색, 전부를 성형하는 것, 결코 같은 세포에서 배양된 게 아닌 엄연히 ‘다른’ 사람 두 명이 점점 쌍둥이보다 더 닮아가는 것, 마치 세포 분열을 거슬러 올라가듯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외양과 취향, 모든 걸 극단으로 밀어붙여 결국 누가 누구인지 구분 지을 수 없게 되는 게 가능한가? 그런데 내가 지금 그걸 눈 앞에서 보고 있는 건가?


이 영상에선 여러 형태의 몸들이 가감 없이 나오고 여러 가지 형태의 사랑도 나오는데 영화 후반에 나를 눈물짓게 한 건 결국 모든 인류가 하는 진부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제이크 유즈나 감독의 대단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압도적이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한 사람들을 전부 등장시키고도 그들의 특별함을 넘어선 공감할만한 사랑 이야기로 풀어내는 능력 말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건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장르임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음악을 표현하는 데 있어 꼭 음악을 연주할 필요가 없는


기존의 인식과 개념을 넘어서는 그 무언가에 대한 예술.

영화를 보는 내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인식에 대해, 마땅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없음에서 오는 충격과 혼란에 나는 여러 번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길 반복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얼굴들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무명) 얼굴들인 동시에 내가 흔히 알고 마주하는 대중(이름이 없는)의 얼굴들이었고 그래서 이 영화가 다큐 필름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 주변에도 있을법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결국 극단적인 특이성 앞에서 그들은 일반성을 주장하고 있었고 문제는 보통 그들에게 있다기보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 못하고 해서 받아들이지 않는 걸  택하는 다수에게 있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영화를 보고 나니 저 대사가 가장 마음에 남았다. 정말이지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제이크 유즈나가 던진 ‘문화’에 대해, ‘일반적인 것’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프랑스에 살면서 자주 도시 간 이동을 위해 기차를 탔었고 그 때마다 꼭 역 내 매점에서 잡지를 샀었다. 한 번은 'intersexuel'(인터섹스) 즉 남녀 양성(남녀추니) 인터뷰를 봤었다. 간혹 두 개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그들의 성은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부모 혹은 의사가 좀 더 드러나 보이는 성 위주로 임의로 선택하는데(수술한다는 의미) 그건 마치 '러시안룰렛을 돌리는 것과도 같다' 고 했다. 그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혼란, 무질서에 속하고 타인이 정한 성에 의해 살면서 여성도 남성도 아닌(생물학적 성은 남성이지만 속은 여성으로 인식하기도 혹은 그 반대), 사이 어디쯤에서 여전히 혼란을 겪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저 논의에 대해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져 2015년 몰타, 콜롬비아에서는 인터섹스 어린이에게 사회적 이유로 수술하는 것을 불법화했다고 한다.


지난달에 운전면허 도로주행을 하면서 일어났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코스별로 한번씩 다 돌고 난 후에 육교 밑 안전한 샛길에 차를 주차하고 선생님과 내려서 잠깐 휴식을 갖고 다시 차에 탔을 때다. 우리 옆을 누군가가 자전거를 휙 타고 지나갔다.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고 건장한 남성처럼 보였었다. 자전거보다는 내 차가 빨랐기에 그를 지나쳤었는데 선생님이 자전거가 가까워지자 ‘사이드미러로 저 사람 한 번 잘 봐봐요’ 했다. 찰나에 거울에 비친 앞모습은 모자를 쓰고 풀어헤친 셔츠 안에 입은 나시 티 안으로 풍선을 넣은 듯 부푼, 그닥 어울려 보이지 않는 가슴이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 아빠 연세쯤 되셨었는데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항상 같은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도는 사람에 대해 혐오보다는 무한한 궁금증만을 보이셨다. 꼭 한 번 내려서 남자냐 여자냐 물어보고 싶다고 하시며.

우린 같이 웃으며 세상에 참 별 사람이 다 있네요.로 마무리했다.


그렇다. 세상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정말 별별 사람이 다 있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한다. 그대로 봐주는 것만 해도 때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인 걸 알기에. 



그 사이 제이크 유즈나 감독의 단편 <내 사랑을 받아줘>2018 가 나왔다. 중증 장애 소녀와 비장애인 청년의 러브 스토리라니. 이제 와서 영화 제목인 open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는데 내 작고 견고한 세계를 이 영화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깨부수고 열어 젖혔듯이 그가 택한 영화라는 장르를 통해서 내가 모르는 세계들을 자꾸 엿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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