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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희 Sep 15. 2020

5살 아이가 수업 중에 물었다. 더 재미있는거 없어요?

거의 한 달만에 아이들 수업을 재개했다. 대부분 5,6세인지라 엄마들이 얼마나 보낼까 했는데 반 이상 나왔다. 개중에는 미술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가 코로나로 휴원하고 다시 온 아이들도 있던지라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보다는 낯설어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괜히 찡한 마음에 한 번씩 안아주고 싶었지만 비접촉 체온계로 열을 재는 제스처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시대에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반가운 표현이다. 


선생님들끼리는 '어우 왔어? 얼마만이야' 하며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마치 어제 본 사이처럼 바로 수업 하기가 뭐해서 그간 어떻게 지냈냐, 학원에 다시 오니 기분이 어떤지 물어봤다. 아이들은 재밌게 지냈다고 한다. 놀이터에서 친구들이랑 논 게 가장 재미있었단다. 


동화책 한 편을 같이 읽고 거기 나온 동물들과 상상의 동물들을 동화책 그림과 비슷한 기법으로 그리는 수업이었다. 한 여자아이가 그린 거북이와 백조를 보고 감탄했다. 

'잘했다'는 칭찬보단 구체적으로 '네가 그린 거북이의 등껍질 무늬 색이 멋지다'라고 말하려고 한다. 반에 다른 아이들이 내가 하는 칭찬에 분명 영향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쟤처럼 색을 쓰면, 쟤처럼 거북이를 그리면 선생님한테 칭찬받는구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선생님이 툭 던지는 '누구누구는 정말 잘하는구나'라는 말에 내가 괜히 주눅 들었던 소심한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 봐도 그렇다.


사실 그 아이가 그린 백조를 보고 당연히 상상의 동물일 거라 생각하고 '이건 무슨 동물이야?' 물었더니 백조라고 했지만 그건 우리가 흔히 보는 백조라곤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건 분명 그 아이의 백조였고 나는 '우와 땡땡이의 백조는 이렇게 생겼구나' 인정해주고 진심으로 그 날아오르는 분홍 백조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떤 아이는 상상의 동물을 그려보자 했을 때 장화 신은 고양이를 떠올렸다. 나는 좀 더 나아가 보길 원했다. 물론 그건 실제로 존재하는 동물은 아니야, 그렇지만 네가 이미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본 것 말고 진짜 너의 상상만으로 된 동물은 없을까? 하니 유니콘을 말했다. 유니콘의 특징이 뭐냐 물었더니 뿔이란다. 그다음엔 아이들 사이에서 뿔 달린 물고기 등 뿔을 결합한 다른 재미있는 동물들이 튀어나왔다. 


반면 어떤 아이는 그림을 아주 잘 그리고 매번 선생님들한테 칭찬받는 게 익숙하기까지 한데 흘겨 그린 듯한 동물 그림책을 일부러 보여주고 물을 많이 탄 수채물감을 주었을 때 결국 자기가 이제까지 그리던 식으로 한쪽 눈은 반짝이고 다른 쪽 눈은 윙크를 하고 있는 만화 캐릭터 같이 아주 반듯한 선을 쓴 동물을 그렸다. 벌써 그림 스타일이 고착화되기 시작한 거다. 이런 아이를 좀 더 자유롭게 그리도록 유도하는 건 쉽지 않다. 분명 칭찬의 영향도 있었을 거다. 그렇지만 상상력도 풍부하고 표현력도 좋으니 아이 머릿속에 이미 박힌 '잘 그린 그림'과 '못 그린 그림'의 경계를 흐뜨려주면 훨씬 좋아질 게 분명하다. 


한 아이만 속도가 늦더니 화장실까지 한 번 다녀오면서 스케치만 해 놓고 반도 칠하지 않았었다. 아이가 화장실 간 사이 한 부분을 내가 칠했다. 맞은편의 아이가 '선생님이 왜 땡땡이 그림을 칠해요?' 해서 '오늘 수업이 다 끝나 가는데 땡땡이 그림에 아직 다 못 칠한 부분이 많아서 내가 대신 여기만 칠한 거야' 했더니 '그런데 땡땡이는 그 부분을 빨간색으로 칠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아차 싶었다. 그 애의 말이 백 번 맞았다. 

'맞아 그랬을 수도 있네. 선생님이 땡땡이가 오면 물어보고 칠했어야 했어'라고 나의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화장실에서 돌아온 그 애에게 여기 부분은 내가 칠했다, 빨간색이 괜찮냐 물으니 괜찮다 했다. 


나 스스로도 욕심을 낸 행동이었다. 그 아이는 오늘 오랜만에 와서인지, 기분이 좀 울적해서인지, 단순히 그림 그리기가 내키지 않아서인지 수업 시간 내내 말을 더 많이 했다. 그런데 학원이라는 체제 안에서 미완성의 그림은 허용되지 않는다. 어설플지라도 부모에게 보여 줄 완성작을 가져가게 해야 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적 없다. 중학생 때는 그림 잘 그리는 반친구에게 대신 그려 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었을 정도로 끔찍하게 싫어했다. 8절 도화지는 커도 너무 컸다. 그러다 미술학원의 입시반에서 자유로웠던 한예종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면서 내가 하는 것들이 좋다는 얘길 듣고선 진짜 그런 건가 의아해하기도 하고 자신감이 생기다가도 다른 요일에 소묘 입시반을 가면 선생님이 '네가 피카소냐' 어떻게 이 물건을 이렇게 보고 그리냐고 질타를 받기도 하며 혼란스러운 시절을 보냈었다. 

그러니까 부모와 학원 원장선생님과 가르치는 나의 입장은 다 다르겠지만 어쩌다 한 번은 아이가 그럴싸한 뭔가를 가져오지 않아도 너그럽게 '오늘은 그닥 하고 싶지 않았구나' 그럴 때도 있지 하고 넘어가 주면 좋겠다. 


마지막 수업에 들어온 5살 아이는 형태가 있는 걸 전혀 그리지 못해서 그림책을 같이 읽고 여러 도구를 사용해 표현을 따라 해 보는 수업을 했다. 아이는 궁금해한다기보다 앞에 놓인 과제를 해치우듯 내가 주는 물감이나 도구들을 번갈아 사용했다. 그러다 

'더 재미있는 거 없어요?'



라고 물었다. 머리가 띵했다. 아이가 수업을, 그림을, 표현을 즐긴다기보다 마치 내가 아이에게 상품을 팔듯이 혹은 결제를 받듯이 '이런 것도 있어요' '이건 어때요?' '저건 어때요?'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절망적이기까지 했던 건 예능이나 실생활에서 못 웃기거나 재미없는 얘기(설사 그게 필요한, 들어야할 말이어도)를 하는 사람을 가차 없이 비난하는 '노잼'이 생각났기 때문이고 아이는 아직 어렸고 이런 즉각적인 재미(feat. 뽀로로)만을 벌써부터 추구해선 안 될 존재여야 했다.  


이 아이는 아직 사회나 세상의 법칙에 길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매우 산만했고 붓이던 뭐던 거칠게 다루는 바람에 나는 자주 그것들을 수습해야 했다. 선생님 입장에선 여간 힘든 게 아니지만 내가 앞으로 이 아이와 해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한다. 하나라도 형태가 있는 뭔가를 그려내고 성취하는 기쁨을 알려주는 것. 대고 그릴 수 있는 원 모양으로 자른 두꺼운 종이를 주고 테두리를 그리게 하니 곧잘 따라 한다. 동그라미를 보니 얼굴 같다며 눈코 입으로만 이루어진 누군가의 얼굴을 그린다. 거기에 나는 내 얼굴을 가리키며 눈썹도 있고 귀도 있고 머리카락도 있는 걸 알려주니 전부 그려 넣었다. 


움직이지 않는 뭔가를 시간을 들여 응시하고 관찰하는 건 정말 중요하다. 사실 이런 관찰력에 따라 그림이나 글 등 내가 표현하는 세계는 훨씬 풍부해진다. 항상 움직이는 화면 속 재미에만 길들여진 아이들의 눈을 적어도 종이 그림책이라던지 글이 적힌 책, 평면 그림 감상에도 익숙해지게 하는 훈련을 하다 보면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다.    

아이가 뭔가를 스스로 해내고 발견해내는 과정에서 진짜 재미를 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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