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찬과의 대화에서
나는 개를 좋아하냐고 물었고 영찬은 전과 다르게 지나가는 개를 보면 귀엽다고는 생각 들지만 ‘개를 사랑’한다거나 하는 말엔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다 했다. 그는 개나 어떤 특정 물건, 취향보단 순간이나 경험에 대한 얘길 했다. 기억에 남을만한 순간이 만들어지려면 우연적인 요소가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순간은 만남이다.
<리추얼의 종말>에서 이전엔 사물들이 주는 안정감이 있었다고 한다. 시골 할머니 댁에 가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쭉 있어왔던 오래된 밥상 같은 것. 그 자리에 쭉 놓여 있었고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보면 작은 유리컵 하나도 그러한 안정감을 줄 수 있다. 프랑스에 살며 작고 오래된 요트를 사서 배를 타러 갈 때, 항구에 다다라 아직은 점처럼 보이는 저 멀리 부표에 묶인 배가 보이고 나무보트에 올라 타 부표가 점점 가까워지며 ‘바라미’가 윤곽을 드러낼 때 나는 ‘이 배가 이렇게 정직하고 고요하게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구나’라는 동물적인 마음을 사물에 처음 느꼈었다.
그에 비해 현대의 물건들은 철저히 소비재로써 기능한다. 언제든 자주 쉽게 사고 버리고 바꾸는 것. 소비 역시 현대사회의 미덕이 된 지 오래다.
아주 비싼 값을 주고 산 물건조차 그만한 가치를 지닐 수가 없는 게 당연한 구조이다.
수년 전, 프랑스에서 부호들이 여름 바캉스를 지내러 오는 작고 호화로운 섬인 상트로페에서 운 좋게 머문 적이 있다. 트러플이 송송 박힌 잠봉을 손으로 집어먹고 더우면 별장에 있던 수영장을 몇 바퀴 돌고 시장에 가서 저녁거리를 사 오고 돌아오는 길엔 정박된 호화요트를 구경도 할 겸 긴 산책을 했었다. 나와 지인들은 차도 옆 도보를 한둘씩 짝을 지어 걷고 있었고 지평선 근처까지 내려온 해를 향해 걷느라 눈이 부셨다. 각자의 걸음 속도로 걷다 보니 우리 일행과 나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끼게 됐는데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와 두 살 정도 어려 보이는 여동생이 내 앞에서 걷다가 그 남자아이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더니 옆에서 걷던 여동생의 정수리에 살짝 눈을 감고 키스를 했다. 둘이 가까이 붙은 틈 사이로 해가 쏟아져 여전히 눈이 부셨고 지금도 가끔 그 장면을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린다. 이에 견줄만한 아름다운 장면이자 순간은 한국에 돌아와 파주에서 서울로 경의 중앙선을 타고 가던 어느 한낮에 내 옆에 한 남자가 앉고 그 맞은편 유일하게 비워진 한 자리에 일행인 것 같은 여자가 앉았다. 난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둘이 손과 팔을 써 가며 마치 왈츠를 추듯이 눈을 맞춰가며 대화하기 시작했다. 몇초동안 그 제스처를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 후에서야 ‘수화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아하고 리듬감이 느껴지는 동작들이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시를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새삼 ‘아차’ 하는 부분들과 대화를 마치고 곱씹게 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사람, 동물, 물건 같은 대상도 좋지만 이런 순간도 마음에 품고 살아 그럭저럭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