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도 우리 집엔 늘 개가 있었다.
그 개들 모두 아빠가 데려왔다. 군대에서 군견반이었던 아빠는 벤시라는 이름의 도베르만을 선임에게 물려받았다. 아빠는 그 당시를 개 한 마리 당 사람 하나가 붙었고 사람 밥보다 개 밥이 더 잘 나왔던 시절이라 회상한다. 그 후 제대하고 엄마와 가정을 이루고 내가 태어나고 걸어 다닐 무렵, 아빠는 도베르만 새끼를 데려왔고 그 개의 이름은 당연히 벤시였다.
내 머릿 속에 남아있는 벤시에 대한 장면은 엄마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아빠 손에 새까만 개가 들려 있었고 하얀색 붕대 같은 걸로 귀를 받쳐주고 있었던 것. 그 시절엔, 특히나 군견들은 본래 덮여 있는 귀를 잘라 뾰족하게 세워주고 꼬리 또한 짧게 잘라 친근하기보단 강한 인상을 주려했었다. 그래서 난 왠만한 강아지는 꼬리가 뭉특하고 특히 도베르만은 날 때부터 귀가 쫑긋한 줄 알았다. 어른이 돼서 접혀 있는 귀와 긴 꼬리를 흔드는 도베르만을 보고선 다른 종인줄 알았을 정도다.
우리는 같이 자랐지만 벤시가 나보다 훨씬 빨리 컸다. 머지않아 벤시는 1층 현관문 옆 보일러실에서 아빠가 퇴근하기를 기다리거나 근처 주유소 옥상에 묶여 있다가 집 뒷 산으로, 야구장 둘레를 따라 산책했다. 어떻게 아빠가 4-5살 아이와 성견 도베르만을 같이 데리고 다녔을까 싶은데, 나는 말처럼 벤시 등에 올라타서 다녔다. 아빠는 로트와일러도 키웠었는데 내가 큰 개들을 보고도 아장아장 걸어가 덥석 안으며 옆구리를 쓰다듬는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고 한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개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고 우린 꽤 깊이 교감했던 것 같다.
벤시는 작고 좁은 보일러실을 모두가 잠든 새벽에 가끔 탈출했다. 그러면 유유자적 길을 활보하는 벤시를 보고 경찰 아저씨들이 '으이그 또' 하면서 집에 데려다줬다. 인식표나 목줄 같은 게 없었어도 동네에 누가 무슨 개를 키우는지 다 알고 지내던 시절의 이야기다.
아빠는 벤시의 마지막까진 함께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나의 초등학교 입학에 맞춰 논밭을 갈아엎어 만든 신도시로 이사했다. 아직도 주변은 허허벌판이었고 그야말로 새로운 도시가 세워지는 중이었다. 우리는 그 첫 번째 이주민이었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땅이었다. 20평대 아파트였고 두 분 다 일을 했기에 벤시를 데려갈 수 없었고 벤시를 잘 키워줄 수 있는 사람을 백방으로 찾았다. 아빠는 이 멋진 개를 감히 돈을 주고 팔 생각도 못했다. 어떤 아저씨의 손에 벤시의 목줄을 건네주며 제발 잡아먹지 말고 잘 키워달라 부탁하고 돌아섰다. 어른이 된 지금 아빠의 그 당시 심정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왔고 아파트에 어울리는 작고 귀여운 요크셔테리어, 말티즈 등을 키우고 또 때가 되면 떠나보냈다. 아빠는 늘 최고의 개만 데려왔다. 아빠 말로 '돈 주고도 못 사는 애들'. 정말 그랬다. 개들을 보면 사람들이 새끼를 내라고 탐냈었다. 난 모든 요크셔테리어는 은빛과 금빛 털을 가진 줄 알았다. 우리 집 뽀미가 그랬으니까. 알고 보니 뽀미는 모견이 일본 최고의 혈통을 가진 대회수상견이었다.
그 후에도 밥을 먹으러 간 식당에 묶여있는 개, 동네 아파트에서 마주친 할머니의 개 등 어디서든 아빠는 눈에 들어오는 개가 있으면 새끼 낳으면 꼭 저 주세요, 했다. 지인들의 부탁으로 코커 스페니얼이나 달마티안을 데려온 적도 있다. 그런데 뽀미가 시름시름 앓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엄청난 천방지축에 혼자 있는 내가 감당하기도 힘들어 며칠 만에 다시 돌려보냈었다.
작년이었다.
아빠가 삶의 의미를 물을 때였다. 어스름한 저녁 아빠네 가 보면 퇴근하고 들어와 간단하게 저녁을 차려 드시고 소파에 붙박이처럼 앉아 티브이를 보다가 잠들고 다음날 다시 일을 나가는 게 끝없이 반복되는, 사실 아빠에겐 너무도 익숙한 가장의 삶이었다.
내가 매일 가서 저녁을 먹을 수는 없는 터, 집에 돌아와서 껌껌한 복도를 마주하고 반겨주는 이나 이제까지 쭉 있어왔던 개도 없다. 작년 추석에 아빠랑 둘이 캠핑을 갔었는데 '아빠 내가 개 한 마리 알아봐서 데려올까?' 하고 툭 던졌는데 의외로 아빠가 '그래 알아봐' 라며 덥석 물었다. 지인이 알려준 반려동물, 유기동물 입양 카페에 30분 전에 올라온 글이 있었다. 사정으로 키울 수 없게 된 5개월 된 이탈리안 그레이하운드라고 했고 간단한 전화통화를 마치고 추석 다음날 집에 올라가는 길에 김포에 들렀다. 아빠네서 키울 거라 최종 결정은 아빠가 하라고 했고 가정집에 도착해 사정을 들어보니 셔틀랜드 쉽독을 키우다가 이 개를 데려온 지 일주일 됐는데 하도 다른 개 털을 먹어서 고양이처럼 털을 토하는 지경에 이르러 병원에선 같이 키우는 게 힘들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입양 보낸다 했다. 셔틀랜드 쉽독의 이름이 나무여서 이 개는 대추라고 이름 지었단다.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난 그다지 이름이 맘에 들지 않았는데 대추야 부르면 귀를 쫑긋하고 바로 알아들었다. 아빠와 나는 대추를 처음 본 순간부터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던 거 같다. 순하고 예쁘고 건강한 강아지였다. 사실 이 때도 7킬로여서 강아지라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었지만. 전 주인은 혹시라도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면 꼭 저희한테 다시 연락 달라고 하며 아빠가 벤시를 보냈던 것 같은 마음으로 대추를 보냈다. 그렇게 우리 집엔 다시 개라는 존재를 가족으로 맞았다. 살다 보니 내가 아빠에게 개를 데려다줄 때가 된 건가 싶어 싱숭생숭한 마음이었다.
아빠가 일 끝나고 집에 왔을 때 여전히 껌껌한 복도 불을 켜야 하지만 그 너머에서 어둠을 뚫고 달려 나와 맞아주는 작고 귀여운 존재가 있을 거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안심이었다.
내 주변에 반려동물을 키우게 되면서 살아가는 이유를 찾게 된 친구들이 있다. "얘 밥 주려면 열심히 살아야지" 그 친구들에게 각자의 고양이나 강아지가 살아갈 동기를 부여해 준다는 게 이 당시만 해도 너무 거창한 게 아닌가란 생각을 했었다. 그럴 수도 있구나 신기해하며 들었었다.
나는 더 이상 읽는 사람, 쓰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작업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기 민망할 정도로 그저 주어진 일을 하고 소비에 충실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나를 몇 달만에 아침에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게 만든 대상이 생겼다.
대추가 가족이 된 지 5개월에 접어드는데 친구들이 '너 대추를 정말 사랑하나 봐'라는 얘길 한다. 그건 대추가 너무 예쁘고 멋지다고 자랑해서가 아니라(대추 계정을 따로 만들어서 거기에 나 보려고 맘껏 올리는 것으로 해결) '홈캠으로 대추가 혼자 집에 있는 거 보면 나 왜 이렇게 안쓰럽지?' 하는 말에서였다. 애견카페 데려가서 빵 먹을 동안 대추를 묶어놓은 순간에도 '미안해'라고 하니 같이 반려견을 데려간 친구는 '아니 이렇게 놀게 해 주려고 데려왔는데 대체 뭐가 미안해?'라고 되물었다. 아빠가 퇴근해서 대추가 난리 쳐 놓은 거 보고 혼내도 오랜 시간 혼자 둔 내 탓이니 눈물 글썽이며 대추한테 '누나가 미안'하다고 한다. 이젠 가족들의 전화통화 첫마디는 '대추는?' '집에 갔다 왔어?'가 됐고 나는 일이던 친구들과의 약속이던 대추 산책을 염두에 두고 시간을 잡게 됐다. 이런 소중한 존재가 생기고 이런 말랑하고 뜨거운 감정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는 친구들의 말을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