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기
프랑스 유학 시절, 트람을 타고 사십 분 정도 가면 나오는 파란색의 커다란 집.
차가 없는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멀고도 안전한 공간이었다.
딱히 뭔가 살 게 있어서 갔다기보다 헛헛한 마음을 두고 오려했던 것 같다.
나처럼 목적 없이 그냥 그곳에 머무는 다른 사람들을 보는 것도 위로가 됐다.
그 당시 그들 모두 피부색의 채도 차이만 있지, 내 눈엔 전부 프랑스인이었는데 나처럼 몇 시간이고 앉아 있던걸 보면 그들도 헛헛함을 내려놓고 있는 이방인 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케아에 가면 직접 앉고, 누워볼 수도 있는 여러 개의 따뜻하고 포근한 방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나도 비슷한 구조와 평수인 원룸에 살고 있었지만 내 방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따듯함이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내 방 대부분의 가구와 소품들이 이케아에서 왔다는 거다.
실제로 이케아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도시에서 처음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이다. 새로 대학생활을 시작한 학생들, 같은 동네에서 일을 하는 룸메이트들, 연인들. 그리고 나와 같은 외국인들.
한국에 와선 꼭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 두 어 번 이케아에 갔었다.
몇 년이 흐른 지금, 운전을 하게 된 서른 중반의 나는 차를 몰고 이케아로 향한다. 오늘은 꼭 살 물건이 있어서가 아니다. 가족이나 친구와 주말이 아닌 주중의 이런 애매한 시간에 이렇게 큰 쇼핑몰에 혼자 가보기도 처음이다. 낭트 외곽의 그 이케아의 그 시간처럼, 목적이 없는 사람들만 드문드문 앉아있는 풍경을 상상했었다.
왠 걸, 식당가에 도착하니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 뭔가를 먹고 있었다. 내 예상이 빗나갔다.
내게 눈치 주는 종업원은 없지만 여기서 백팩 속 노트북을 꺼내도 되는 건가 우물쭈물하며 저기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 인파 속 혼자인 사람들이 보였다.
네 시가 되니 늦은 점심을 먹던 사람들도 꽤나 빠져 한적해졌다. 절대 맛있을 리 없는 커피를 한 번 더 리필해서 비로소 여기 온 목적인 글쓰기를 감행했다.
한국에 온 지 어느덧 5년이 되가는 나는, 여전히 모든 비밀번호는 프랑스 은행에서 우편물로 지정해 준 번호를 쓰고 있고 새 털친구들과 함께지만 내 가정을 이루진 않았다. 프랑스는 뭐든 개인적이어서 주치의처럼 내 계좌를 언제든 열어보고 조언해 주는 은행원이 있었고 매 달 집에서 받던 돈과 나의 지출을 살펴보며 보험을 바꿔보는 건 어떻냐는 얘기도 들었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아무와도 내 계좌를 공유하지 않지만 유학생시절처럼 월말엔 계좌에 종종 0이 찍히며 리셋된다. 가족들과 다시 하우스메이트가 돼서 그만큼 가까워졌느냐 하면 쉽게 그렇다고 하지 못하겠다. 엄마나 아빠를 가장 잘 아는 건 그들이 매일 허심탄회하게 통화하는 동창들이지, 나는 당장 오늘 내 부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 기분은 어떤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막연한 미래는 오지 않는다, 가 내가 내린 결론이다.
어찌어찌 시간은 흐르고, 해도 바뀌고, 나 자신도 가끔 병원 약봉투에 찍힌 만 나이에 깜짝 놀라기 일쑤지만 그건 남들에게도 똑같이 흐르는 시간의 흐름일 뿐이다. 촘촘한 계획 없이 살아온 p는 이제 j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러고 싶다.
이번 달, 갑작스러운 통보를 받았다. 새 학기다, 이사 시즌이다 뭐다 해서 아이들 수업이 대폭 줄었다. 매번 학원 수업을 줄이고 다른 생산적인 일에 더 시간을 쏟고 싶다 바라왔는데, 이런 식으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 1회 출근을 하게 되니 당장 이번 달 생활비가 걱정이다. 그리고 갑자기 펼쳐진 끝없는 시간들이 두려웠다.
프리랜서는 일이 많으면 자존감이 오르고 일이 줄면 어쩔 수 없이 자존감이 떨어진다. 프리랜서 지인에게 내 위기를 설명하니 '어디든 성수기랑 비성수기는 있는 법이잖아'라고 짬바를 섞은 조언을 해 줘 조금의 위안을 삼았다.
오후 4시 반, 프랑스 시간 표기법으로 16h 30은 프랑스에선 공식적으로 정해진 '간식 시간'이다.
L'Heure de goûter [뢰흐 드 구떼]라고 읽는다. 주로 아이들에게 간식을 먹이는 시간이지만 어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공식적인 당 충전 시간이다. 한참 일을 하다가 오후 업무의 치열함이 지나간, 저녁이 오기 전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프랑스 사람들만큼 '쉼'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도 없다. 내가 일했던 꽃집에선 온갖 종류의 초코과자, 젤리, 사탕 등을 담아둔 바구니가 있었는데 언제든 가져가서 먹을 수도 있겠지만 4시 반에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먹은 그 초콜릿이 그렇게 달 수가 없었다.
나의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니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였던가?) 하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내일 당장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불안하다면 이 불안을 잠재울 유일한 방법은 '내일 할 일을 적기'이다. 그리고 내침 김에 이번주, 이번 달 계획도 좀 세워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