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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파고 Jan 27. 2021

스타강사의 세기적 스캔들

종교와 전쟁으로 점철된 중세 틈바구니에서 가냘프게 숨 쉬며 살아남은 문학작품이 전해지고 있으니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이다. 오래전 세계사 교과서의 짧은 한 줄이 떠오른다. 중세 자유연애의 효시? 라던가. yes24의 번역본 소개로 그들의 사랑을 요약해보자.     


책 소개

39세 철학자와 17세 소녀의 허락받지 못한 사랑

수도사와 수녀가 되어 서로에게 보내는 사랑과 수도의 편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는 중세 시대에 수도사와 수녀 사이에 오고 간 사랑의 편지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또한 아벨라르가 엘로이즈를 사랑한 죗값으로 거세당하는 등, 그들의 특이한 사랑의 배경으로 인해 이들의 편지는 더욱 눈길을 끈다.     
1118년, 파리에서 철학자로 명성을 떨치던 아벨라르는 성당 참사 회원 퓔베르의 조카딸 엘로이즈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당시 아벨라르는 39세였고, 엘로이즈는 재색에 미덕까지 갖춘 17세 소녀였다. 둘은 큰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내 사랑에 빠졌고 아들을 낳은 후 비밀리에 결혼하였다. 그러나 퓔베르는 약속을 어기고 이들의 결혼을 세상에 드러냈으며, 이에 항의하는 엘로이즈를 괴롭혔다. 아벨라르는 퓔베르의 학대로부터 피신시키기 위해 엘로이즈를 아르장퇴유 수도원으로 보냈다. 아벨라르가 엘로이즈를 수녀로 만들기 위해 보낸 것으로 착각한 퓔베르는 가문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보내 아벨라르를 거세하였다. 이 일로 아벨라르는 생드니 수도원으로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고, 엘로이즈는 아르장퇴유 수녀원에서 수녀가 되었다.(이하 생략 yes24)     


참으로 선정적인, 요즘이라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만한 중세 최대의 스캔들이다. 그들의 비밀 결혼은 사실 죄가 아니었다. 수도사의 결혼이 완전히 금지된 것도 아니었고, 교회의 승낙이 없어도 결혼할 수 있었다. 물론 귀족 가문의 여자에게 결혼이란 가문 사이의 거래와 동맹 관계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성직자와의 결혼이 허락을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혼전 관계가 문제였다면 모를까, 아이가 태어난 후 결혼하는 경우가 드문 일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는 딱히 없다. 아벨라르의 자존심 때문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하물며 질투에 불타올라 극단적인 복수를 한 삼촌이라니! 거세라는 사적 복수가 이 스캔들의 선정성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아벨라르에 대한 처벌은 거세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생 드니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지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강의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로 그는 뛰어난 학자이자 명강사였다. 그러나 수도원에서도 못 견디고 나와야 했다. 여성 교육의 지지자 인 그는 1131년 상파뉴에 여성을 위한 최초의 수도원인 Paraclete를 설립했다. 엘로이즈는 나중에 수녀원장이 되었는데,  아벨라르는 편지에 운영에 대한 조언을 쓰기도 했다.      


파리로 돌아와 재개한 그의 강의는 여전히 명성과 인기를 과시했다. 반대자들은 교황에게 강의를 막아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규정했는데 클뤼니 수도원 원장이 중재에 나서 투쟁 포기를 설득했다니 재판 과정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싸웠던 것 같다. 클뤼니 수도원은 주교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 수도원장은 자신이 아벨라르를 보호하겠다고 교황의 허가를 받았다. 이단재판 과정의 고통 때문이었을까, 그는 수도원에서 평화와 안전을 찾은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벨라르의 죄는 무엇인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비운의 삶을 살았던 아벨라르의 죄는 남녀상열지사를 제외하고도 대략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의 죄는 동시에 그의 업적이기도 하다.       

하나는 학문뿐 아니라 적을 만드는 데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이다. 스승 기욤의 이론을 가차 없이 논파하는 등 어떤 논쟁에서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고 탁월한 그의 논리를 아무도 이기지 못했다. 그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학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를 시작했고 1110년 주교의 관할에서 벗어난 첫 번째 대학을 설립했다.      

1846. 아벨라르의 초상 

그는 뛰어난 학자이자 강연자로 명성과 추종자들을 얻었다. 그의 이론과 강의방식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의 대학에 모델이 될 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 과정에서 그와 논쟁을 벌인 거의 대부분이 적이 되었다. 수도원에 있을 때에도 수도사들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고 위선을 폭로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그는 엘로이즈에게 “세상이 날 증오하게 된 건 논리학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가 굳이 겸손의 미덕까지 갖출 필요를 못 느꼈던 건 사실이다.        


두 번째는 이단의 죄인데, 신학자이자 철학자로서 보기 드문 지성을 가진 그로서는 피할 수 없는 죄였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신학은 신의 계시와 완전한 믿음에 근거한다. 그리고 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인  시대였다. 신학이 다루는 계시는 논리적 모순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신앙만이 그 모순을 구원할 것이다. 하지만 아벨라르는 논리를 통해 이를 극복하려고 했다. 맹목을 이론으로 격파하고 권위의 근거를 추궁하는 지식인이 맹목적인 권위의 심판에서 무사할 수 없었다.      


문턱을 넘어선 지성      


당시 학자들은 보편이 먼저냐, 개체의 유일성이 먼저냐는 길고 지루한 논쟁을 하고 있었다. 이 논쟁은 사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보편 실재론의 원형이다. 즉, 인간이라는 개념이 인간 하나하나의 개체보다 먼저 독립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와 개인, 로마교회와 개별적인 교회 사이의 지위와 가치를 묻는 논쟁으로 이어졌다. 답은 뻔하지 않은가?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등 대부분의 주류 학자들은 보편실재론을 옹호했다. 이에 반해 로스켈리누스는 실재하는 건 개체뿐이며 보편이란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개념에 불과하다고 맞섰다.       


아벨라르는 자신의 스승인 기욤의 보편실재론을 철저하게 분석해서 공격적으로 논쟁을 벌였다. 결과는 그의 승리였다. 그가 독창적 사상으로 발전시킨 <온건실재론>은 논리적 사유를 통해 보편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보편적인 용어는 의미를 가지고 일차적으로 개념을 표시한다. 이를 통해 현실적인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데, 그 본질은 수많은 개체 속에 있다.
(중세의 재발견 /박수찬) 


인간이라는 종을 예로 들면, 수많은 개별 인간들이 지닌 속성들로 인간의 개념이 만들어지고 지성을 통해 이들을 이해함으로써 보편적인 개념을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 지점에 오기까지 당대의 학자들이 줄기차게 싸웠다. 마침내 그 문턱을 넘는 순간 이성과 합리주의의 씨앗이 뿌려졌다. 사실 우리에겐 낯익은 개념이다. 변증법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서 『그렇다와 아니다 Sie et Non』에서는 다양한 견해 사이의 서로 상반된 주장을 대비하며 어떤 것이 타당한 근거를 가지는지 판단해서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이 방법은 중세 대학에서 정규 토론과 자유 토론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이론은 백 년 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완성되어 13세기 스콜라철학으로 정착했다.          

파리 페르 라 셰즈 묘지의 두 사람 

오랫동안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프랑스의 대표적인 나쁜 놈으로 손꼽히던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오명을 벗을 수 있었다. 1817년에 엘로이즈와 함께 페르 라 셰즈에 나란히 묻혔고, 12세기의 (사실은 중세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그의 편지와 자서전 『나의 불행한 이야기』는 개인의 고백록이자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두 사람의 실존적 삶의 증거일 뿐 아니라 중세의 절정기, 12세기에 얼마나 역동적인 문화가 꽃을 피웠는지 보여주는 소중한 자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아벨라르가 중요한 이유는 그의 이론 덕분에 한 시대가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신앙이 맹목으로 전락하지 않고 설득력과 명분을 장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심지어 신뿐 아니라 신이 창조한 모든 것, 인간과 자연 하나하나가 세상의 일부라는 시선은 중세 문화의 토대가 되어 풍부한 유산을 남길 수 있게 했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아벨라르에게서 시작된 물줄기는 결국 인간이 진보라고 부르는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신과 인간, 영혼과 육체, 천국과 지옥, 구원과 원죄, 빛과 어둠 등 대립되는 개념들이 이상과 현실의 조화라는 변증법적 결론을 통해 명쾌한 메시지로 중세를 관통했다. 사람들의 고단한 현실은 천국이라는 이상을 만날 때 구원을 받는다. 고딕 성당은 온몸으로 그 메시지를 구현했다.   

    

중세인들에게 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장소는 자연과 성경이다. 교회는 이 모든 것을 담음으로써 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 천국이 되기로 작정한다. 그래서 태초에 빛이 있었듯이 계시와 축복이 빛으로 쏟아지며 천국을 완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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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라르뿐 아니라 중세 페미니스트 엘로이즈를 주목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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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 대기자의 사랑학개론(18)]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편지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6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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