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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파고 Feb 08. 2021

 희망의 설계자들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      


10세기 프랑크 왕국의 대주교 아달 베롱은 “우리가 하나라고 믿는 신의 집은 셋으로 나뉘어 있나니, 이 세상에는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이 있도다. 이들 셋은 하나로 뭉쳐 있나니, 서로 떨어짐을 견디지 못하리라.”라고 하였다.     


중학교 교과서의 중세 첫 부분 도입부에 인용된 글이다. 요즘 교과서는 정말 훌륭하다. 다른 참고자료가 필요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들로 구성해서 책만 줄줄 읽어도 이해가 되게 만들었다. 이 인용구는 중세의 핵심을 설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      


오래전 플라톤이 이미 왕과 군인, 일꾼으로 국가의 구성원을 규정했는데, 기독교 국가에서는 왕 대신 성직자가 제1순위의 신분을 가지고 왕은 싸우는 사람에 포함되어 2순위로 강등된 셈이다. 아달 베롱의 말처럼 이 셋은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중세만큼 사람들의 영혼을 구제하는 일로 최고의 지위를 누리는 집단이 양적으로 늘어난 시대가 있었던가. 고대의 사제를 먹여 살리기란 쉬웠다. 플라톤의 시대에 군인은 농부이기도 했다. 일꾼의 대부분은 자유민이었다.     


중세에는 기도하는 사람과 싸우는 사람을 먹여 살리느라 일하는 사람의 허리가 휘었다. 일주일에 3일을 그들의 땅에 가서 일해야 했고, 자기 땅에서 나는 곡식의 일부를 또 세금으로 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생 드니 수도원의 인근 마을들은 부활절이 되면 달걀 1100개를 바쳤다. 893년 프룀 수도원은 소유한 농가가 200가구였다. 그들은 매년 달걀 2만 개를 수도원에 납품했다. 현대식 양계장에서 산란만을 목적으로 기르는 닭은 10일에 평균 9개의 알을 낳는다고 한다. 야생닭은 그보다 훨씬 적게 낳고 일부는 부화시켜야 할 것이고 2-3년이면 산란이 끝난다. 닭들이 전염병이라도 걸리면 그조차 불가능해져 고스란히 체납자가 된다.    

    

부유한 수도원들은 자유민들에게 소작의 조건으로 부역 의무를 부과하여 비자유민으로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자산을 교회에 양도하고 다시 빌려서 경작하는 식으로 소작농이 되었다. 이런 일은 드물지 않았다. 권력자(교회든 영주든)가 요구하는대로 내놓지 않으면 어차피 몰수당할 뿐이고 스스로 바치면 그나마 추방은 면해서 정주민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농들은 스스로 자유를 반납하고 소작농 심지어 농노가 되기도 했다. 기도하는 사람과 싸우는 사람들이 일하는 그들을 구제하고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싸움을 벌이면 농민들은 전쟁터로 끌려나가 죽었다. 죽는 것 외에 그들이 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서로 죽이다가 남는 병력이 많은 쪽이 승리하는 법이다. 그들이 죽은 자리에는 정복지의 포로들이 노예로 끌려와 메꿨다. 작센이나 슬라브족은 처음부터 노예 공급을 목적으로 약탈당했다. 노예 slave의 어원은 슬라브 sklave/slawe에서 유래했다.      


영원한 형벌     


사실 10세기 초에 노예는 아주 중요한 상품으로 거래됐다. 프랑크-이베리아-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까지 이어지는 노예 루트가 있었다. 동유럽에서 비잔틴, 오리엔트로 가는 무역로로 추정되는 지역에서는 철로 된 족쇄가 집중적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노예 수송에 쓴 족쇄로 추정한다. 9세기 바그다드에는 거세된 슬라브계 남자 노예가 많았다고 한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노예들 중 상당수가 슬라브 출신이었을 것이다. 세례 받은 기독교인이 이교도에게 노예로 팔리는 것은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개종하지 않은 야만족들에 집중됐다. 노예를 팔아 이슬람의 금과 은, 동방의 비단과 양모 같은 사치품을 수입했다.      


이들은 법적 권리는커녕 인권도 없었다. 집 안에 가축을 같이 키우는 구조였으니(가축을 키울 정도면 그나마 살만한 집) 가축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이 같이 뒹굴며 살았다. 말이나 소처럼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는데 거기에 신에 대한 의무까지 주어졌다. 그들은 영혼이 비천하거나 아예 없으므로 성직자가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이들에게 영혼이란 무엇인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지옥에 대한 상상 없이 어떻게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겠는가
농민에게는 현실이 지옥인데
벽에 그려지거나 새겨진 지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종교가 사람들에게 지옥의 개념을 주입시키는 의도와 그에 대한 시니컬한 반론을 간단하게 보여주는 대화이다. 두려움과 공포만큼 인간을 통제하기 쉬운 방법이 있을까. 더구나 영원히 계속되는 형벌이라면. 바이킹들에게 죽음이란 발할라에서 신과 함께 할 수 있는 영원한 삶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제일 좋아하는 일, 영원히 싸우는 영광을 누린다. 물론 싸움터에서 전사로 죽었을 때만 가능하다. 손에 칼을 쥐고 죽지 못하면 그의 영혼은 얼음에 갇혀 지옥을 떠돈다. 전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맹렬하게 싸우는 전투력은 바로 이 내세관에서 나온다. 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달려 나가겠는가.      


하지만 밭을 가는데 목숨을 걸라고 할 필요는 없다. 생산성만 높이면 되니 그저 소나 말처럼 열심히 일하면 된다. 가난한 자는 천국으로 가고 게으른 자와 돈 많은 자는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에 선다고 겁을 주면 된다. 문제는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고단하고 괴롭기 짝이 없어서 하루하루가 지옥인데, 역시 죽을 때까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태복음 25:41)     


어느 나라든 지옥은 대개 뜨거운 불로 묘사된다. 하지만 방점은 영원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끝은 있다>는 희망이 그나마 사람을 살게 하는데 그 희망마저 부재하는 게 지옥이다. 그런데 현세에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두려움조차 상실하고 거칠 것이 없게 된다. 지배자들은 통제가 안 되는 세상을 가장 싫어하므로 그들은 사람들이 시지프스가 되기를 원한다.


자기 계발의 전도사에게 시지프스는 끝없는 도전의 상징이지만, 결국 정상을 밟지 못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 중세의 시지프스가 갈 곳은 하나님의 나라, 죽어서야 밟을 영원한 천국이다. 한 사회의 희망이나 꿈이 그려지는 과정은 흥미롭다.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달콤한 약속이 희망이다. 이 순간에도 그 약속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 다니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교회 역시 지옥 같은 세상을 만든 주역이다. 그리고는 선한 길까지 요구하며 천국의 인솔자로 나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지옥으로 협박해도 현실의 지옥 앞에서는 한계가 있다. 교회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일을 하면서 더 온순한 어린양으로 살게 하려면 뜨거운 지옥불로 옭아매는 것과 함께 현생에서도 천국의 맛을 보여줘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신의 존재는 찰나의 순간이면 족하므로 아주 잠깐이면 충분하다.         


9세기에 무려 12번의 큰 기근이 들었다. 왕은 빵값의 상한가를 정해서 그 이하로 규제했다. 지주들은 자유민과 노예를 보호해야 했는데, 특히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의무를 부여했다. 여기에는 성직자도 예외가 아니어서 수도원은 쌓아놓은 식량과 물자들로 빈민을 구제하는 역할을 했다. 농민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일해서 바친 그 곡식들을 받으며 굶어 죽는 걸 면하게 돼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것이 잠깐의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랴.     

 

수도원은 봉건영지와는 또 다른 한 지역의 중심지이자 생산의 주역이었다. 자비와 근면으로 무장한 은둔자들이 차갑고 높은 돌담 안에서 한 일들은 꽤 많다. 중세 사회의 세 계층이 얼기설기 뭉쳐지도록 볼트를 조이고 빠져나가지 않도록 움켜잡은 주인공이라고나 할까.        


속세를 지배하는 은둔자       


중세의 수도원은 로마를 정점으로 하는 교회의 권력화에 반기를 들고 선교를 위한 훈련에 집중한다는 목적으로 주로 산간 오지에 세워졌다. 원래 로마제국의 귀족계급 출신인 베네딕트가 동 고트족의 박해를 피해 동굴에 칩거하면서 제자들과 만든 공동체에서 유래한다.       


그는 베네딕트 수도원을 세우고 『규율집 Rules』을 만들어 질서와 규범을 통한 지혜로운 수도생활을 추구했다. 이 규율은 수백 년 동안 지켜졌는데 야만족들이 침략하자 수도사들은 규율집을 들고 로마로 피신했다. 교황은 선교사들을 통해 이 규율집을 기독교 사회에 전파했고 유럽의 모든 수도원들이 채택하면서 공동의 관습으로 자리 잡았다.    

  

수도사들은 침대와 요, 베개만 소유할 수 있으며 정해진 올바른 식사를 하고 수도원에 종신제로 정주하고 순명을 중시했다. 규율 뿐 아니라 수도원장에게도 절대복종해야 했다. 잘못했을 경우 징계는 은밀한 권면부터 추방까지 5단계로 나뉘어 있고 회개하면 수용했지만 세 번을 넘으면 영구 추방에 처했다. 수도원은 로마교회와 영주로부터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서 작은 공동체 단위의 수도원장은 절대 권력이나 다름없었다.     


수도사들은 새벽 2시 반부터 시작되는 7번의 기도와 필사, 노동으로 근면한 하루를 보냈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젊은 수련사 아드소가 베네딕트 수도원 출신이고 윌리엄 수사는 브리튼 출신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이다. 1과에서 7과로 된 소설 구성이 바로 이 일곱 번의 전례 시간에 따른 것이다. 성경과 얼마 안 남은 고대 문헌을 필사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게 다뤄졌다. 특히 노동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을 가져오는 역할을 했다.


이전까지 육체노동은 노예 같은 최하층민들이나 하는 천한 일로 멸시를 받았었다. 하지만 전체 인구의 90%가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에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 상황에서 노동력 부족은 재앙이었다. 수도원은 육체노동에 게으름을 막고 겸손을 실천하는 도덕적인 지위를 부여했다. 또한 속죄의 의미도 담았다. 이제 노동은 기도와 함께 성스러운 수도자의 의무가 되고 지성과 결합될 수 있는 행위로 승격했다.      


그렇다고 농민의 지위가 올라간 건 전혀 아니다. 생산성의 가치를 그나마 인정받은 것이다. 수도원의 노동은 유럽 전체에 황무지 개간을 활발하게 하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카탈루니아, 카스티야처럼 자유민들이 정착한 곳은 드물었다. 늘어난 경작지로 생산성이 높아져도 거의 지주 직영이 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부역 의무는 더 늘어나기만 하는 슬픈 결과로 이어졌다. 공유지를 개간한 농민에게 소유권을 주기도 했는데, 개간 후 30년 간 경작하는 게 조건이었다.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그냥 당나귀 눈 앞에 당근을 흔들어주는 걸로 보인다.     

 

수도원은 당시 교육의 중심지이자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과 약국이면서 여행자들의 숙소이기도 했다. 한 지역의 유일한 문명 특구였던 셈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교회는 왕이나 영주처럼 대지주로서 세금과 부역을 받으며 농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소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 외에 달리 문명의 인프라를 유지할 주체가 없었다.     


교회가 어느 정도 부자였는가 하면, 616년 르망의 주교가 소유한 토지는 30만 헥타르에 달했다. 생 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도 3만 헥타르가 넘는 땅을 가졌다. 땅에는 소작농이 딸려 있었다.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면서 교회는 노예 노동력의 주요 수혜자이기도 했다. 샤를 대제 시대 알퀸 수도원장은 노예 2만 명을 소유했다. 디종이나 리에주, 누아이용 등 유명한 포도 산지에는 가까운 곳에 주교 관저가 있다. 교회에서 포도주를 성찬으로 사용하면서 전 유럽에서 포도를 재배했는데, 이 역시 교회의 소유지가 많았다.     

 

이랑쟁기나 삼포제 농법, 굴레와 편자 같은 마구 개발은 농업의 혁명을 가져왔다. 특히 물레방아는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한 역사적 발명일 것이다. 8세기 생 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의 영지에는 물레방아가 84개나 있었으니 대부분의 농민들이 사용했을 것이다. 물론 사용료는 교회에 내야 한다.      


국유지를 이전받고 개간으로 경작지가 늘어나면서 교회의 재산은 점점 늘어났다. 교황은 전쟁을 지휘하고 왕국의 분쟁과 왕위 계승에 개입하면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수도원은 그런 교황의 충실한 오른팔로 부와 권력을 행사했다. 가톨릭이 유럽 전역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사람들의 삶에 밀착할 수 있게 한 데에 수도원의 공은 결정적이다. 교회로서는 봉건제의 영주나 왕의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기도 했다. 은둔자들은 가장 세속적인 힘과 부를 차지한 존재가 되었다.   


신의 왕국에서 신의 이름으로 가지게 된 부와 권력으로 신의 집을 짓는 것, 더 크고 아름답게 신의 세계를 지상에 구현하는 건 그들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었다. 그래야만 부와 권력은 더욱 강고하고 완벽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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