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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파고 Jan 07. 2021

첫 번째 유리창을 찾아서  

건축물에 창문이, 그것도 유리창문이 설치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유럽에서 유리창은 1600년대가 한참 지나서도 특별하고 희귀한 물건이었다. 잉글랜드 안 위크 성의 성주들은 깨지는 걸 우려해서 유리창을 떼어서 보관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중산층들이 어느 정도 유리창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도 창문세라는 기이한 항목이 생길 정도로 오랫동안 그 희소성은 계속됐다.

     

종이를 넘길 때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던 1280페이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1830년대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거대한 백과사전 같은 작품이다. 장 발장을 비롯한 수십 명의 등장인물의 인생사가 격변기의 시대와 맞물린다. (소년 가브로슈의  부모라니! ) 그 맥락을 뒷받침하는 정치 사회상의 묘사를 보면 입이 벌어진다. 장 발장에게 은촛대를 선물하는 미리엘 주교의 삶은 소설의 첫 부분 한 챕터를 고스란히 차지한다. 완역본 1280페이지에 달하는 원작이 얼마나 섬세하고 생생한지 다음 구절을 보면 실감할 것이다.       


어느 날 주교는 (시골마을 교구의) 대성당에서 이런 강론을 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선량한 친구인 여러분! 프랑스에는 대문과 창문을 합쳐 문이 세 개 밖에 없는 농가가 132만 호, 대문과 창문을 합쳐 두 개 밖에 없는 집이 181만 7천 호, 그리고 대문 밖에 없는 오막살이가 34만 6천 호가 됩니다. 이것은 대문세와 창문세를 징수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가족, 늙은 부인과 어린아이를 그런 환경에 두니 질병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공기를 주셨으나 법률은 그것을 인간에게 팔고 있습니다......”     

(레 미제라블 p.27/ 더 클래식)


이때가 1830년대, 19세기이다. 물론 이 세금이 유리창문의 희소성을 증명하는 특별소비세의 성격인지 세금 징수에 혈안이 돼서 쥐어짜 낸 악덕 징세인지는 알 수 없다. 벽지세도 있던 시절이니 두 가지 이유가 다 해당될 것이다.     



프랑스 몬주에 지역 주택 @동아일보

이 집은 프랑스 파리 외곽 북서쪽 지방에 있는 주택이다. 지하까지 4층 건물인데 그리 크지 않아보이지만 샤토라고 부르는 걸 보아 시골 귀족의 집이었던 모양이다. 160년 전 지었다고 하니 대략 1860년대 건물이다. 미리엘 주교의 한탄에 비춰 이 집의 창문세는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19세기 산업과 경제의 판도가 바뀌면서 현금이 부족한  유럽의 귀족들은  이런 호화주택의 유지비를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부동산을 팔거나, 그럴 여유도 없으면 현금 지참금을 들고 오는 돈 많은 부르주아 평민과 결혼하는 걸로 해결했다고 한다.

미국의 신흥 부자들이 유럽의 고성을 사고, 귀족 사위를 장만하려고 달려갔다. 처칠의 어머니도 그렇게 결혼한 부잣집 딸 중의 하나였다.







그보다 훨씬 전의 기록으로는 1390년대 이탈리아에 남아있다. 당시 부자들은 교회와 빈자에게 더 많이 기부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시대였다. 채색 유리창, 즉 스테인드글라스도 기부 물품 중 하나였다. 비용은 브라차 당 3피오리노(플로린)였다고 한다. 브라차는 당시 직물을 재는 단위인데 한 팔을 쭉 뻗었을 때의 길이, 약 58센티 정도이다. 피오리노는 14세기부터 상업과 경제의 중심지였던 피렌체에서 쓰던 금화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화폐였다. 1피오리노는 3.5그램 정도의 순금으로 만들었고 주로 생필품을 거래하던 최하단위 1데나리의 240배 가치였다.  그래도 어느 정도인지 딱히 감이 잡히지는 않는다.

  

피오리노 금화에 대해서 참고할만한 재미있는 기사가 있다.

      

@매경
순금 3.5g 정도는  100만 원 이상의 구매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정말 나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순금 3.5g 정도는 2012년 기준으로는 25만 원 정도지만 내가 돌아다니던 당시에는 100만 원 이상의 구매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내가 5개면 네 식구의 한 달 생활비가 됐고 10개면 한 가족이 풍족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연봉을 기준으로 보자면 고급 기술자는 연간 50~60피오리노를 받았고, 은행 지점장은 150을 받았습니다. 은행 지점장 정도의 연봉을 주면 피렌체 대성당에 돔을 설계한 천재 건축가 브루넬레스코나 천재 예술가로 추앙받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도 고용해 일을 시킬 수 있었지요.     


쓸 만한 주택 한 채의 가격은 1000, 그런 주택의 1년 임대료는 20, 말 한 마리 가격은 50, 하인의 일 년치 봉급은 20이었습니다. 나는 노예도 살 수 있었는데 젊은 여성 노예는 150피오리노에 거래됐습니다.     

양정무 교수의 Money&Art 인용 /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철학박사 https://www.mk.co.kr/opinion/columnists/view/2012/06/383820/     


이 글로 추정해보면 길이 3미터 정도의 유리창은 약 10피오리노, 쓸만한 주택의 반년치 임대료와 맞먹는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이웃 토스카나 공국의 프라토의 상인은 더 구체적으로 일기를 남겼다. 그는 1407년 작은 창문들이 있는 집을 지었다. 페네스트레 임파나테 finestre impannate라고 해서 가벼운 나무틀에 기름을 바른 아마포와 면직물로 가림막을 끼웠다. 왜냐하면 작은 원형 유리창문을 만들려면 무려 40피오리노나 줘야 했기 때문이다. 유리창 하나가 2년 치 임대료인 셈이다. 토스카나는 1332년부터 유리창을 사치품 목록에 포함시켜 어마어마한 세금이 붙은 것이다.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인들은 창문도 방도 굴뚝도 아예 없는 집-오두막에서 살았다. 집은 커다란 하나의 공간이었고 내부를 홀hall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홀에서 먹고, 마시고 회합을 가지고 매일 밤 홀 어딘가에 글자 그대로 자기 잠자리를 마련해야 make a bed 했다. 여러 가구가 함께 사는 집이라 만취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의 잠자리에 기어들어간다는 게 단지 농담만은 아니었다. 빌 브라이슨은 『모든 것들의 사생활』에서 홀 위로 2층이 생기고 방이 등장했을 때 비로소 사생활이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연기와 그을음은 배출이 안돼서 항상 머리 위에 가득 차 있었다. 벽에 네모난 구멍을 뚫게 된 뒤에는 마포나 기름 먹인 종이, 가죽 등으로 바람을 막았다. 이것은 상류층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납땜으로 이어 붙여 만든 투박한 유리창이 띄엄띄엄 있었을 뿐이다.      


우리가 비상용으로 사용하는 랜턴은 ‘빛이 들어오게 하는 돔형 채광창’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여기서 어렴풋이나마 고대 유리창문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물론 유리창문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달리 어떻게 빛이 들어올 수 있겠는가. 설마 구멍만 뚫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324년 로마의 아우렐리우스 성벽 밖  사도 바울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 바오로 대성당  내부 - 로마가 기독교를 인정한 후 국가가 지은 첫 기념관이다.  


유럽이나 서아시아의 거대한 건축물들에서나 제대로 된 유리창을 볼 수 있는 건 실제로 그 시대에는 황제, 왕, 교단만이 거의 유일한 건축주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톨릭 건축에서 커다란 창문, 특히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창문이 당시 얼마나 특별하고 초월적인 장치였을지는 지금의 우리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그 창문 앞에 서기까지 피할 수 없는 길에서 사람들은 피를 바쳐야 했다. 신의 행로, 전쟁의 시간을 지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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