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들이 '특이하다'라고 할 정도로 군대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훈련소에 가면 자연스럽게 변비가 생긴다는 이야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데 눈을 열심히 치웠다는 이야기, 훈련 나가면 숟가락을 쪽쪽 빨아먹는 게 설거지라는 이야기 등등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류의 에피소드들은 언제 들어도 정말 재미있었다. 지금도 틈만 나면 남편에게 군대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똑같은 이야기인데 들을 때마다 재밌는 걸 보면 확실히 내가 조금 이상하긴 한 것 같다.
사실 군필자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건 '군대'라는 특수성과 그 특수한 집단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조상님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가고 싶지 않았던 군대에 억지로 끌려가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과 몇 년을 어울려지내며, 이전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체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나의 상식과 상상 밖이었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 엄청나게 중요해지고, 왜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일들을 억지로 하며 놀라운 꼼수를 만들어 내고, 열악한 환경을 어떻게든 버티고 극복하려 애쓴 일화들이 40대나 30대나 20대가 비슷하다는 점도 놀라웠다.
자주 이야기를 들어서였을까.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내가 겪는 일들이 껍데기만 다른 군대 에피소드 같다고 느껴질 때가 많아졌다. 군대 선임이 후임에게 했다는 말과 행동, 군인들의 사고방식, 그들이 나누는 이성에 대한 이야기 등등. 자꾸 군대가 오버랩되니 점점 '진짜 그런 거 아닌가?'라는 의심이 시작되었고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달라진 시선으로 다시 보게 된 내 주변에는 상당히 많은 군대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고 나 역시 그런 문화를 때로는 즐겁게 소비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나 사회현상으로 가볍게 넘기기엔 무거운 것들도 많았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몇몇 대선 후보들이 '모병제' 공약을 내놓았다. 찬반양론은 팽팽한 듯하다. '모병제' 키워드는 사실 굵직한 선거 때마다 정치권이 자주 만지작거린 이슈 중 하나였다. 찬성하는 측에서는 주로 첨단 무기전인 현대전에서 단순 병사 수 보다는 정예 군인이 더 필요하고, 남성 청년들이 징집으로 인해 자기 계발을 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크며, 징집으로 인해 군대 내 부조리가 더욱 만연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반대하는 측에서는 병사의 수는 군대 전력과 직결되며, 모병 시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학력이 낮은 사람들이 주로 지원할 가능성이 역차별이 될 수 있으며, 월급 지급으로 인해 국방 예산이 오히려 증가할 수 있다는 등의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주장도 실제 벌어지게 될 현상의 명확한 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 넘게 이어진 커다란 시스템에 변화가 필요한 시기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 강고하게 자리 잡은 낡은 시스템은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발목 족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를 벗어나 우주를 향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나라의 청년들은 여전히 재래식 군대에 가야 한다는 스트레스로 20대를 시작하고 있고, 그곳의 문화에 푹 절여지는 시간을 거쳐 다시 사회로 나온다.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는 우리나라 말고도 많은데 '병영국가'라는 표현이 지나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종전국이 아닌 '휴전국'이다. 우리는 전쟁이 완전히 끝난 나라가 아닌 '잠시 쉬고'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부모들이 젊은 아들들을 군대에 자연스럽게 보내는 것도 수십 년간 이 불안감이 세대를 거쳐 전해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설마 전쟁이 또 나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뿐, 전쟁의 공포에서 해방된 채 살아갈 수 없다. 모두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을 머릿속 어딘가에 의식하며 살아가는 나라. 그 전쟁을 대비해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하는 나라. 군대의 시스템과 문화가 사회 곳곳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나라. 그래서 나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병영국가'라 부르고 있다.
아들 가진 엄마가 성인이 되는 아들을 보며 군대 보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본격적으로 미래를 만들어갈 청년이 군대는 몇 살에 가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군 가산점 제도와 호봉 차이를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이제 그런 나라에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