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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arah May 10. 2020

시작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 누군가에게

괜찮아, 너의 결심대로 해도

2012년 7월 17일, 보도국에 들어서 국장실로 가는 길은 유난히 길고 조용했다.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던 기자들은 나를 이종의 생명체 보듯 흘깃거렸다. 잔뜩 경계하는 시선들을 뚫고 국장실 문 앞에 가기까지의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다. 국장실에 들어가 사표를 내고, 국장과 면담하는데 걸린 시간은 5분 정도였을까 싶다.


국장은 내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내 표정을 보니 말려도 듣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보다 싱거운 말을 하며 알겠다고 했다.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 한 명이 퇴사를 하겠다고 하니 반가웠던 것일까. 어쨌든 약 5년간의 기자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솔직히 두려웠다. 국장실 문을 열기 직전까지 내가 포기해야 하는 많은 것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매달 월급이 들어오는 따뜻한 직장과, 유명한 방송국 기자라고 친척들 앞에서 자식 자랑을 하는 아버지의 자부심과, 이 회사를 계속 다닌다면 내가 올라갈 수도 있는 여러 가지 자리들. 지금은 다 기억도 나지 않는 많은 것들이 결심까지 가는 발걸음을 때로 멈칫거리게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모든 두려움은 사표를 내고 국장실 문을 닫은 순간부터 사라졌다. 조심조심 눈치 보며 걸었던 보도국 복도를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어 나왔다. 내가 포기할까 말까 고민하던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되자 두려워할 여유도 사라졌다. 다시 낯선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만 한다. 내가 만들었지만 마치 운명 같은 이 의무감이 기분 좋았다.



그 후로 8년. 나는 그때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가 선택한 드넓은 세상은 늘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취재나 보도자료로만 접하던 세상에 직접 뛰어들어 갖게 된 고민은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한 분야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전문성을 쌓은 사람들의 열정과 식견을 통해 겸손함도 배웠다. 내가 한 선택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대의에 가려진 작은 불의들을 무조건 참고 넘기지 않게 되었다.


그 뒤에도 나는 몇 번의 이직을 더 했고, 지금은 IT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비영리 영역에서 일하며 느꼈던 것들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영역이 IT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연결을 통해 사람들이 소통하고 세상을 바꿔나가는 것. 그 최전선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 속에서 배우고 느낀 것들은 이 글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재미있었다.



물론, 내 첫 직업이었던 '기자'를 폄하하거나 그곳에서의 경험과 일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기자생활로 얻은 지식과 간접 경험의 다양함은 단언컨대 어떤 직업도 줄 수 없는 것들이다. 지금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자의 소명을 다해 취재하는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다만 그때 당시의 언론환경, 조직 문화, 일의 방식이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럼에도 그것을 버티느냐, 떠나서 새로 시작하느냐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고, 지나고 보니 그것이 새로운 세계와 연결된 '시작의 문'이었다.


점차 내가 지나온 삶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내게는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던 시간들을 신기해하고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했다. 대부분 나의 선택을 '대단하다'라고 말하며,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 고 했다.


삶의 모양은 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기에 나는 섣불리 '그렇게 해봐'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각자의 고민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고, 고민을 재고 비교하는 저울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니까. 그리고 나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사실 시작이 어려운 게 아니라 내게 익숙한 어떤 것들을 '끝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 어떤 간절함이 있다면 끝을 선택해도 '괜찮다'라고 말해준다. 진짜 하고 싶다면 해도 괜찮다고. 너는 멋진 사람이니까 분명 네 선택에 책임을 지며 열심히, 즐겁게 살아갈 거라고. 멋진 끝맺음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멋진 시작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여전히 나는 모든 걸 손에서 내려놓고서야 잡을 수 있는 것들이 있고, 인생에서 시작의 개수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내 시작에 대한 확신을 위해서는 지금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후회 없는 끝을 만들어야 기쁜 시작을 맞이 할 수 있으니까. 누군가는 신기하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어리석다고 말하는 내 삶이, 마음이 내게는 예쁘다. 여전히 시작을 꿈꾸고 그것을 위해 끝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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