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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arah Nov 19. 2017

책임감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 일까?

내 마지막 반려견 '봄이'를 추억하며 

지금 내 발 밑에서 곤히 잠자고 있는 고양이 '미고'는 코리안숏헤어로 흔히 사람들이 '잡종' 이라거나 '도둑고양이'라고 부르는 족보 없는 5살 고집 센 아이다. 1살 때까지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느닷없이 나에게 온 냥이로 만 4년을 나와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미고와 함께 하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은 책 한 권쯤은 거뜬히 쓸 수 있을 정도다. 우리 집에 온 첫날 잔뜩 겁에 질려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천천히 집 안 냄새를 맡으며 탐색하던 모습, 처음 발톱을 깎아주던 날의 극심한 긴장감, 몸이 아파 병원에 데려가며 느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걱정과 두려움 등등. 어제 자는 모습이나 내일 자는 모습이나 실은 별반 다르지 않은데 세상 예뻐 자꾸 사진을 찍어대고, 결국 휴대전화 앨범에는 언제 찍었는지 알기도 힘든 똑같은 포즈의 사진들이 빼곡하다. 실패할 걸 알면서도 또 안았다가 버둥대는 손톱에 당해 팔에 피가 철철 나고, 쓰다듬는 것 하나도 조심조심 신경 쓰는 여지없는 집사의 삶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요즘 야근이 잦다 보니 제대로 못 해주고 있어 밤마다 내 옆이나 발밑에 누워서 곤히 자는 미고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동생과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은데도 미고는 절 데려와준 사람이 나이기 때문인지 잠은 대체로 내 곁에서 자고 늘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닌다. 


미고를 키우면서부터 한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이 종종 떠오르곤 한다. 하얀 털에 맑은 눈이 사랑스러웠던 나의 마지막 강아지 '봄이'의 기억이다. 


두 살 터울의 오빠는 동물을 좋아했다. 하굣길에 병아리를 팔고 있으면 있는 용돈 없는 용돈 탈탈 털어 꼭 몇 마리를 사 오곤 했다. 그런 병아리들은 대부분 일주일도 안돼 저 세상으로 떠났다. 하지만 오빠는 포기하지 않았고 건강한 병아리를 선택하는 법을 연마해 드디어 병아리 두 마리를 벼슬이 돋아나는, 닭 직전의 단계로 까지 키워냈을 정도였다. (그 병아리들도 한 마리는 당시 키우던 이른바 똥개 '메리'에게 물려서 죽고, 다른 한 마리는 그 후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다.) 거북이를 어른 손바닥만 하게 키우기도 하고, 아빠의 몸보신용으로 시골에서 어린 똥개를 보내주면 결국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인지를 알면서도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그에 비해 나는 그 정도로 동물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맹숭맹숭 누룽지 같은 존재였다. 물론 귀엽고 사랑스럽기는 했지만 너무 일찍 저 세상으로 가버리는 동물들에게 마음을 많이 주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도 마음을 빼앗긴 강아지가 바로 내가 5학년 때 외삼촌이 데려온 '봄이'였다. 이름이 '봄이' 인지 '보미' 인지 정확히는 모른다. 진짜 이름은 끝까지 알지 못했다. 겨울의 끝자락에 온 봄이는 흰 진돗개의 피가 섞인 잡종견이었다. 하얗게 덮인 털이 인상 깊었지만 등 쪽에 동그랗게 누런 털이 있었고, 한쪽 귀는 진돗개처럼 쫑긋 솟았지만 다른 쪽 귀는 꺾여있었다. 뭔들 어떠랴. 처음 보는 흰 강아지에 우리는 열광했다. 집 안에서 지내던 봄이는 날이 풀리자 마당 개집으로 옮겨졌다. 혹시 춥진 않을까 헌 옷가지를 깔아주며 걱정스러워 자꾸 들여다보곤 했다. 거의 매일 함께 놀고, 남매가 돌아가며 밥을 주고 대소변을 치웠다. 


진돗개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었을까. 봄이는 지나치리만큼 우리밖에 몰랐다. 2층에 세 들어살던 다른 사람들을 아침저녁으로 보면서도 아침저녁으로 짖어댔다. 밤이고 새벽이고 낯선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리면 짖어서 동네 사람들 눈치도 많이 보였다. 


'봄이야.' 하고 부르면서 가만히 쓰다듬어주면 봄이는 금방 진정하고 바닥에 엎드려 내 손길을 느꼈다. 봄이는 어쩌면 집 안에서 우리 모두의 손길을 느끼던 그때가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종종 봄이를 집 안으로 데려와 함께 잠을 자는 꿈을 꾸곤 했다. 


내가 중학생이 되고, 귀가 시간이 늦어지면서 봄이와 함께 놀아줄 시간이 자꾸만 줄어들게 되었다. 나만큼이나 봄이를 좋아했던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봄이는 하루 종일 줄에 묶인 채 아주 좁은 공간만을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봄이의 몸이 자꾸만 아프기 시작하던 때도 그때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자꾸만 설사를 하고 날로 야위어갔다. 엄마가 병원에서 약을 타 와 먹였지만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픈 가운데서도 충성심은 여전해 낯선 사람의 방문엔 여전히 큰 소리로 짖었다. 


우리 대신 봄이를 오롯이 돌봐야 했던 엄마도 그 당시 몸이 좋지 않았고 결국, 우리에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봄이를 개장수에게 팔아버렸다. 개장수에게 가기 전까지 버티던 봄이는, 개장수의 케이지에 들어가고 나서는 조용히 엄마를 바라만 봤다고 한다. 나는 그 장면을 보지 못했지만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봄이의 검은 눈은 아마도 촉촉이 젖어있었을 것이다. 텅 빈 개집을 바라보며 나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봄이 역시 잠깐 내 곁을 다녀갔던 아빠의 몸보신용 개들처럼, 그렇게 잠시 곁에 머물다 간 것뿐이었다고. 


나는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봄이를 잊고 지냈다. 때론 봄이의 이름마저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하지만 미고가 나에게로 오면서부터 나는 자꾸만 하얀 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억은 점점 생생해져서 내 손에 닿던 털의 감촉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미안했다. 미안해서 울었다. 너를 더 사랑하고 책임지지 못해서. 너의 마음을 모르고 그렇게 아프게 해서. 짧은 네 삶의 마지막에 큰 아픔을 남겨줘서. 그렇게 떠나보내서.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미안해 미안해 사과했다. 너는 참 예쁜 아이였다고. 너보다 더 예쁜 강아지를 여적 보지 못했다고. 그런 네가 나에게 와줘서 정말 고마웠다고 말해주었다. 


미고를 볼 때마다 봄이를 생각한다. 나는 아주 많이 부족한 집사이지만 봄이처럼 그렇게 황망히 떠나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짧은 묘생 내 옆에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름을 많이 불러주고, 만지면 좋아하는 곳을 한 번이라도 더 쓰다듬어주고, 나랑 놀고 싶어 할 때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같이 집안을 달려주리라. 그게 내가 이 작은 생명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며, 내 강아지 봄이에게 속죄하는 길인 것 같다. 


책임감의 무게를 저울로 잴 수 있을까? 나는 지금은 7킬로그램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뚱냥이 미고의 몸무게. 봄이를 통해 알게 된 이 귀한, 지켜주고픈 생명의 무게.


봄이의 이름이 '봄이' 인지 '보미' 인지 가족들 사이에 토론이 벌어진 적이 있다. 아무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나는 '봄이'라고 생각한다. 봄에 내게로 온, 부드럽고 따뜻한 강아지. 꽃봉오리처럼 와서 너무 일찍 져버린 희고 깨끗한 꽃을 닮은 강아지. 다음 생이 있다면 꼭 다시 나의 반려견이 되어주길. 오늘도 마음속으로 너의 이름을 부른다. '봄이야, 고맙고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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