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각자의 모습으로 삶을 살아간다. 서로 대화를 하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지만 각자의 고민, 고통, 병과 삶과 죽음을 함께 할 순 없다. 작게는 각자의 피부나 외형의 경계로, 크게는 각자의 방과 생활공간.. 거시적으로는 나라와 행성으로 공동체의 범위가 넓어진다.
오늘 만난 사람을 내일 만날 수 없다. 내일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런 세상에서 아빠와 아들이란 유일무이한 관계로 맺어진 민재와 나. 삶과 죽음은 함께 할 순 없지만, 그 안에 수많은 스킨십과 추억들은 각자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만은 분명하겠지.
부산에서의 둘째 날. 아침 7시가 넘은 시간에 민재 목소리 알람이 울린다.
“민재야 오늘은 뭐하고 놀까?”
소박하게 있을 거 다 있는 호텔의 조식을 먹고 호텔 침대에서 뒹굴거린다. 이런 뒹굴거림과 여유로운 시간이 흔하지 않을 만큼 하루하루가 꽉 채워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런 민재의 모습을 보는 것이 맘이 아프다. 아직 2학년인데.. 비어있는 시간이 많이 없이 생활하는 아이, 꿋꿋하게 해야 할 것들을 주도적으로 해나가는 아이이지만, 무엇이 맞는 길로 인도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부산에서의 하루를 가득 채우기를 바라는 민재이기 때문에 조금 쉬어가려는 생각은 접어둔다.
둘째 날의 해운대 하늘도 맑고 푸르다. 이른 아침부터 바닷가에서 일정을 즐기는 이들.. 외국인들이 많아져서 해운대 바다라는 느낌보다는 세계 어느 여행지 바다라는 생각도 든다. 특히 러시아인들이 많아진 게 놀랍다.
해운대 앞바다에서 1003번 버스를 타고 문텐로드 방향으로 간다, 달맞이고개 초입에서 내려서 사우나로 걸어가는 길이 정겹다.
“민재야 올해 봄 기억나? 이 아파트 단지에 꽃이 많이 피어있었잖아. 우리 사진도 많이 찍고 그랬지~”
“응~ 기억나~ 꽃이 되게 예뻤는데~ 지금은 푸른 나무들만 있네~~”
함께 추억하며.. 연고도 없는 낯선 여행지에 시간이 지난 느낌을 공유하는 것이 즐겁다. 고향이 없는 우리에게 제2의 공통 고향이 되어버린 부산. 어찌하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다. 게다가 부산엔 좋은 느낌과 추억들이 겹겹이 쌓여버려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우나에서 스파를 하고, 찜질방에서 계란도 사 먹는다. 토요일이지만 사람이 많지 않아 민재는 시시해했지만, 나는 좋았다.
적당히 사람들이 있는 게 내 성향상 맞다. 이렇게 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며 사우나를 하는 기분. 정말 특별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사물함 자석 열쇠가 작동이 안 되어 고생을 좀 하다가.. 민재가 봄에 갔던 '소반'이라는 식당이 또 가고 싶다 해서 찾아올라 간다.
달맞이 고개를 오르다 보니 덥고 힘들고 시간도 많이 지체되어 민재에게 묻는다.
"민재야~ 이러다가 우리 부산 국립과학관이랑 해운대 바다 두 군데 다 못 가겠다~ 아래에서 밥 먹고 갈까?"
민재는 많이 아쉬워했지만, 자기도 힘든지라 내 뜻에 응한다.
걸어서 가다 보니 사우나 약간 밑 쪽에 소반이란 이름으로 식당이 있다. 같은 이름의 가짜 식당 이려나?
의혹이 가득한 마음으로 그 식당을 찾아 들어갔는데 종업원이 낯이 익다.
"저.. 혹시 가게가 이전한 건가요? 올 봄에 저 위의 같은 이름 식당에서 도다리 쑥국을 먹었는데.."
"네~ 일루 이전한 지 한 두 달 정도 되었어요~ 그곳엔 다른 가게가 생겼는데 사람들이 많이 헷갈려 하더라고요~"
유레카~!
애써 올라갔으면 허탕 칠뻔했는데 맞게 찾아왔구나~ 민재와 나는 쾌재를 부른다.
실패 없는 맛 불고기 전골을 시켜서 먹는다. 정갈한 식단이 입맛을 사로잡는다.
점심을 먹고 나니 2시가 넘은 시간이라 민재에게 묻는다.
"민재야.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야. 박물관과 바다 둘 다 갈 순 없을 것 같은데 어느 곳 하나를 포기할까?"
한참을 생각하던 민재가 대답한다.
"음.. 과학체험은 어제 많이 했으니까 어제 놀다 아쉬웠던 해운대 바다 가서 놀자~"
의사표현이 확실한 민재. 좋아 가즈아~!
폐 기찻길을 지나 해운대를 지나 호텔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오늘은 튜브 2개를 빌려서 제대로 즐겨 보고자 한다. 어제 오늘 파도가 엄청 세다.
튜브에 앉아서 파도를 맞이하니 얼굴보다 더 높게 오는 파도가 무섭게 덮친다. 민재는 그것이 무섭지도 않은지 파도의 흐름을 몸으로 익히고 그것을 더 재미있게 탈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서 즐긴다.
‘어쩌면 놀이라는 것은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재미있으면 되는 거구나.’
아이를 통해 또 하나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갖가지 편견들로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곤 한다. 우리 기준에 맞지 않으면 서툴다 잘한다 못 한다로 판단해버리고 그 당사자의 기분은 파악하지 않은 채 타인을 제멋대로 판단해버리곤 한다.
전에 TV에서 언어에 대해 이야기한 어느 강사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우리나라 사람처럼 발음과 어법에 집착하는 민족은 없다고.. 언어라는 것은 서로 의사전달만 되면 되는 것인데 유창하게 구사하지 않으면 무시하는 눈빛을 보내고 타인의 등급을 매기곤 한다고..
나도 그런 나라의 그런 사람들 속에서 그런 사람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자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태도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물과 바다에서 노는 것도 멋지게 수영을 하거나 능숙하게 파도를 타지 못하면 '에이~' 하곤 했었는데.
'아이처럼 수영도 독학으로 익혀볼까?'
한참을 물과 하나가 되어 놀다가 오늘도 폐장 무렵이 다가왔다.
"민재야 이제 나갈까? 끝날 때가 다 되었어."
민재는 아쉬워했지만 자기도 실컷 놀았다고 느꼈는지 기꺼이 나간다.
호텔에 들어가서 씻고 모래를 털고 잠시 휴식시간을 가진다. 중간중간 호텔에서 쉬는 시간 너무 좋아..
한참을 쉬다가 민재에게 묻는다.
"민재야 저녁에 먹고 싶은 거 있어?"
민재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대답한다.
"응~ 자장면~ 민재 자장면 먹고 싶어~"
바닷가에서 자장면이라니.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라서 잠시 당황한다. 잠시 후 이 또한 나의 편견이었음을 깨닫고 중국집을 검색해본다.
'그래. 바닷가에서 자장면 먹으면 그게 왜.. 바닷가 왔다고 꼭 해산물 먹어야 하는 법칙 있나? 항상 편견에 사로잡혀 한 쪽 면만 보다 보니 다른 면을 보기를 게을리했구나.'
민재는 말한다.
"아빠~ 그리고 오늘도 마술쇼 같은 거 하나 가보자. 그리고 인형 뽑기 같은 것도 하고 싶어~"
"그래~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건 너무 좋은 거야. 다 하자."
밥을 먹으러 가는 길의 발걸음이 가볍다. 기온은 적당하고, 관광하러 온 사람들의 얼굴엔 대부분 웃음꽃이다. 내 몸과 공기조차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으며 민재 손을 잡고 총총 걷는다.
해운대 시장을 거쳐서.. 50년 전통의 중국인이 운영한다는 중국집을 찾는다. 나는 별로 밥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간자장 하나와 깐풍기를 시킨다. 깐풍기는 정통식으로 닭 뼈가 있는 요리였다. 양념은 버섯과 피망, 양파 등을 다져서 약간 매콤 짭짤하게 만들었는데 맛이 기가 막히다. 간자장도 불 맛이 적당히 나는 게 전통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맥주와 함께 요리를 먹는 호사를 누리다 보니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한다. 민재도 너무 피곤해서 밥을 많이 먹지 못하고 눈이 충혈된 채 꾸벅꾸벅 조는 것 같길래 남은 음식을 포장해서 나온다.
해운대 시장 초입에선 오늘도 버스킹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한쪽에선 외국인이 기타 연주를 하고 있었고, 한쪽에선 개그맨인듯한 두 남자가 신청곡을 받아 노래를 하고 있었다. 또 해운대역 근처의 광장에선 라이브 분수 쇼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것저것 축제를 즐기다가 해운대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인형 뽑기도 하며 해운대에서의 마지막 밤을 마음껏 누린다.
‘피곤에 지쳐서도 들어가기 싫어하는 민재. 언제 이렇게 컸니? 이젠 친구처럼 술 빼고 모든 것들을 함께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구나.’
하늘의 달은 상현달. 어제보단 목성과 조금 멀어진 거리. 토성 역시 밝게 빛나고 있다. 10시가 가까운 시간에도 사람들로 불야성을 이룬 해운대 거리. 다양한 나라의 외국인들이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마치 신혼여행 때 하와이 와이키키 밤거리를 지날 때의 느낌이다. 그때는 아내와 함께.. 지금은 민재와 함께..
‘시간은 거짓말처럼 흐르고 흘러서 나의 나이도. 내 주변인의 상황도 모두 변해버렸구나.’
호텔에 들어와서 민재는 책을 보다가 잠이 든다. 나는 맥주 한 캔에 살짝 음악을 들으며 해운대 거리를 내려다본다.
끊임없이 지나다니는 사람들. 바다 중간 어두운 부분에서 간간히 펼쳐지는 불꽃놀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소모하고 시간을 보내며 웃고 즐기며 하루를 소비하고 있을까? 매년 오는 해운대 거리의 사람들도 계속 변하고 나도 변한다. 새로운 사람을 스쳐 지나가고, 그들이 여행 시에 원하는 가치들도 전부 틀리겠지. 어떤 이는 힘든 삶에 해방감과 활력을 얻기 위해서.. 어떤 이는 힘들고 의무적인 일정을 소화하러 온 이도 있을 거고 어떤 이는 삶의 중요한 가치를 찾으러 온 이도 있을 것이다.
잠든 민재를 위해 호텔의 조명을 어둡게 줄인다. 호텔 안이 밝아 잘 보이지 않던 바깥 풍경들이 더 훤히 보인다.
‘나는 어둠이다. 어둠 속에서 내 주변의 작은 빛조차 서툴게 흘리지 않으리라.’
민재와의 시간이 잠시나마 힘들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을 돌아보며 물끄러미 민재를 내려다본다. 키도 크고 마음도 무럭무럭 커가는 아이. 너와의 모든 시간에 마찰이 없는 시간이 많았다면 어린 네가 본의 아니게 수용한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겠지.
이제 점점 커나가면서 자기 의견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것일 테니 대화와 마찰, 서로 의견을 주고받고 합의해 나가는 방법들을 스스로 터득하게 해야겠지..
워낙 현명하고 무난하게 모든 것들을 잘해나가는 아이이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걱정보다는 나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하다.
‘계속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 나이 드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깊음 어둠이 되어 그 어떤 빛도 수용하리라. 그리고 내 마음속 심연의 별을 아이가 봐줄 수 있는 때가 되면 반갑게 웃으며 그 별에 대해 깊이 이야기하리라.’
민재와의 두 번째 밤이 기울어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