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다 14

잊히는 것과 지나가는 것

by Far away from

새로운 하루가 밝는다. 출근하는 차 안에서 어학이나 경제 관련 강의를 듣는다. 노가다의 출근 시간은 무척 이른 시간이지만 그 시간에도 차들이 적지 않다. 9시 출근인 회사들은 차가 더 막히겠지.. 생각하고 위안하며 엑셀을 더 힘껏 밟는다. 계절에 따라 출근 풍경이 다르다. 한 여름에는 꽤 따가울 정도의 햇볕을 맞으며 출근하고, 겨울철에는 새벽 별을 보며 출근한다. 같은 출근시간이지만 날씨에 따라 느껴지는 바가 전혀 다르다. 출근을 하여 자리에 앉기 시작하면서부터 분주한 하루가 시작된다. 출근길의 가끔은 감성적인 정서가 날아가고, 현실과 계획과 해야 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시키는 것. 일의 우선순위들이 생겨난다. 그 많은 것들을 가슴에, 머릿속에 담아둔 채 아침체조를 하러 현장에 나간다.


아침조회 당번일 때는 항상 긴장된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것들이 익숙해져서 두려움도 긴장감도 없을 줄 알았는데.. 똑같이 긴장되고 똑같이 두렵다. 오히려 지켜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짐에 따라 두려움과 긴장감이 더 커지는 것 같기도 하다. 준비한 멘트를 다 못하고 끝날 때도 많다. 그럴 때면 찝찝한 기분이 하루종일 간다. 수많은 노가다의 얼굴을 마주 본 채 그들의 아침을 내 손에 든 마이크로 마주하며 소화하기는 제법 나이가 들어버린 나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각자의 일터로 흩어지고 현장에 굵은 일들을 처리하고 나면 약간의 여유시간이 생긴다. 잠깐의 여유가 있는 시간도 일터에서는 완벽하게 여유롭지 못하다. 일생각, 일걱정,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집안에서의 크고 작은 일들. 해결될, 혹은 해결되지 않을 수많은 걱정과 고민들로 마음은 항상 적당히 답답한 상태를 유지한다. 적당한 답답함에서 조금 더 답답하면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힘이 들고, 조금 덜 답답하면 제법 그럴싸한 미소가 나올 때도 가끔 있다.


점심시간이다. 한미팽 과장님이 자주 하는 말


“나는 그냥 살기 위해 밥을 먹어. 아무거나 먹으면 되지 뭐~”


내겐 먹는 것이 삶에 있어 상당히 많이 즐거운 일중에 하나인데.. 그것조차 생존의 수단이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 가슴이 더 답답해진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주변사람들의 말과 행동, 뻔히 보이는 칭찬과 질책에도 나의 마음은 많이 요동 치는 편이다.


점심을 먹고 어두운 사무실에서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그 시간조차 자신을 마주하지 않으려 서둘러 눈을 붙이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책을 읽거나 필사를 하거나 괜찮은 음악을 들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나와 같은 I 성향의 사람들은 혼자만의 정화하는 시간이 무척 중요하다. 한미팽 과장님의 지속적인 찝쩍거림에도.. 윤어캣 과장님의 부담스러운 관심인지 감시인지 모를 두리번거림에도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이런 혼자만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잠깐 졸고 일어나면 사무실의 불이 켜진다. 항상 불이 켜지면 후회를 한다.


‘좀 더 일찍 잘걸..’


오후 시간은 좀 더 희망적으로 지나간다. 5시까지 얼마나 남았지?를 되뇌고 되뇌다 보면 어느덧 5시가 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 온다. 지금까진 반드시 왔다. 아무리 힘들고 지치는 날이라도.. 5시는 반드시 왔다.


퇴근 시간.. 하루의 노가다 일상이 지나가는 차 안에서 생각에 잠긴다.


사회 초년생 때는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 정신력을 소모하며 살았다면, 중년층이 되어서는 익숙한 것에 익숙해지지 않고 삶에 새로운 동력을 끊임없이 공급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익숙해지지 말아야 한다. 새로워야 한다. 그리고.. 활기를 가져야 한다. 활기를 가지는 방법 중 가장 효율적인 것은 어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굳이 대화하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그냥 스쳐 지나치기만 해도 충분히 충전이 된다. 그들의 행동 그들의 표정과 말투만 보고 느껴도 그들의 많은 것들이 보이는 듯하다.


어쩌면 지하철이나 대중교통을 타고 출퇴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대학 때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들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했다. 다양한 생김새와 행동패턴, 대화방식이나 옷차림 등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간접경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어찌 보면 출퇴근 시에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노가다의 단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을 보다 보면 또 지쳐서 혼자 출퇴근하고 싶어 할지도 모르지만.. 인생의 많은 것들이 도돌이표를 타고 돌고 돈다. 같은 후회를 반복하고 같은 실수도 반복하고.. 좋았던 것이 싫어지고 싫었던 것이 좋아진다.


나의 어린 시절과 사회 초년기 시절을 생각한다. 젊었을 때 젊음의 소중함을 모르고 산다는데 난 그렇진 않은 것 같다. 항상 소중하고 간절했다. 항상 죽음을 떠올리며 죽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 절박하게 깨어있으려 했던 시간들이 지금은 흐릿한 기억정도로만 남아있다. 과거의 많은 ‘나’의 기억들이 안갯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다.


“앞으로 모든 일들은 니가 다 해야 한대이~”

라고 말씀하셨던 권달프 차장님도


“이과학 과장 좀 봐봐. 얼마나 가치 있어 보이냐? 너도 저렇게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대이”

라고 말씀하셨던 김섯또 차장님도


함께 게임을 하며 주리고 외로운 밤을 현장에서 고되게 함께 했던 많은 동료들이 지금은 같은 곳이 아닌 곳에서 새로운 노가다를 하고 있고, 혹은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서서히 잊히는 것과 지나가는 내 삶에 유성처럼 긴 꼬리를 남긴 채 흐릿하게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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