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으로
전방을 향해 힘찬 함성 발사!!!
'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힘찬 함성소리로 시작하는 아침. 그렇지만 거구의 안전 과장님이 보이지 않는다.
'선배~ 안전과장님 오늘 연차세요?'
'네 말 못 들었나. 안전과장님 뇌출혈로 쓰러졌다 아이가. 지금 인사불성이라 카드라~'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사망사고 처리하느라 고되게 일한 건 알았지만 그 건강한 거구가 뇌출혈이라니? 나이도 40대 초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급한일만 서둘러 마무리하고 병원을 찾는다.
입원실 밖에 과장님의 가족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나와있다. 그 표정만 봐도 심상치 않은 상황이란 걸 짐작케 했다. 들어가지 못하는 중환자실에 작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과장님의 얼굴.. 건강하신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태산만 한 거구는 쓸모를 잃었는지 힘없이 쳐져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 혈색 없는 얼굴..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사람은 살았지만 산 것이 아니고, 건강하지만 건강한 것이 아니다. 이미 그 모든 운명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굴레 속을 뱅글뱅글 도는 기분이랄까. 특히나 노가다의 하루하루는 무척이나 변화무쌍하다.
안전 과장님인 권 떡대 과장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둘 다 아빠를 닮아한 떡대 하는.. 그 떡대 아들 둘이 눈만 껌뻑 껌뻑 병실 앞을 지키고 있다. 형수님은 눈물을 삼키고 아들 둘을 토닥여주고 있다.
그분이 당장 어떻게 될 것만 같은 망상에 시달렸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몇 개월이 흐르자 다행히 회복되어 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나서야 한시름 놓게 된다.
'쉽게 앓아눕지도 못하는 아버지의 이름을 가진 과장님.. 잘 돌아오셨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형수님이 하시는 연극이라고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다. 완쾌되신 과장님의 곁엔 어느덧 더 커버린 아들 둘이 웃으며 앉아있었고, 연극 속 형수님의 캐릭터는 익살스러운 바보 캐릭터였다. 그분의 지인들도 많이 왔고 면식이 많이 없는 나도 바로 앞에 앉아있었는데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정말 바보처럼 연기를 하셨다. 무언가 초월한듯한 그 바보 연기에 나는 '삶의 슬픔'을 느꼈다. 웃기는 모습에서 눈물이 났고, 밝은 모습에서 서글픔이 느껴졌다.
최근에도 난 누군가의 뇌출혈 소식을 들었다. 과거와 다른 것은 이번에는 뇌출혈로 인한 사망이라는 것..
협력업체로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해왔던 사람. 누구보다도 자기 일에 자부심이 넘쳤고, 그러므로 인해 야근과 주말근무가 잦았었다. 그분의 믿어지지 않는 부고 소식을 듣고 그분 연락처를 뒤져 카톡 사진을 찾아본다. 바래진 필름 느낌의 프로필 사진.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의 프로필 문구는 '행복하자..'였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노가다를 하는가? 과정론과 결과론이 있을 것이다. 과정론을 빌어서는 과정이 행복하고 이치에 맞으면 결과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결과론은 과정은 어떻게 되든지 간에 결과가 좋으면 좋은 것이다. 하지만 노가다의 보편적인 논리에 '아버지'라는 단어를 대입해보면 그 어떤 논리도 서그 퍼진다.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버린 아버지도 슬프고,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지만 일찍 이별을 하는 아버지도 슬프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답은 하나. 많이 함께하고.. 오래 살아야 한다.
분위기 메이커인 김유비 대리. 귀가 커서 유비라고 불리는데, 나와 마찬가지로 건설회사 출신이라 노가다들이 좋아하는 포인트를 잘 알고 회식자리에서 분위기를 띄운다.
'김유비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김유비 대리가 게임을 시작하면 수십 년을 노가다밥을 먹었던 아재 소장 팀장급들은 입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몰입하기 시작한다. 남자들끼리라서 무척 칙칙하고 재미도 없지만 그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다.
과거에 난 신입사원이던 시절 진로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한 적이 있다. 처음으로 회식 후 노래방을 갔을 땐데 각 신입사원들이 갖은 기교로 분위기를 띄웠는데 나 혼자만 부장급처럼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한 기수 선배인 한들선(한살많은 들되먹은 선배)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선배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권기사. 니는 노가다 하려면 그케 하믄 안된대이. 내는 체질에 맞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아나. 기사들은 무조건 이런데 오면 미친놈처럼 놀아야 하는기라~'
회식 후 2차가 진심으로 스트레스였던 그 시절.. 하지만 난 나의 방식으로 그 난관을 넘겼고, 세상에 '무조건'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미친놈처럼 노는 것도 좋지만 미친놈이 흔하다면 나 같은 '점잖은 놈'이 오히려 노가다의 빈 곳을 채울 수도 있다는 거. 나 같은 놈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노가다에 '무조건'이 없다는 것이 내가 아직도 노가다판에서 살아남은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