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량 보존의 법칙. 열량 보존의 법칙이 과학적인 이론이라면 존재들간의 소통에는 소통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감정적인 법칙이 존재한다.
처음에 아기로 태어나 말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는 상태이지만 아이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엄마들은 신기하게도 아이의 상태를 보고 아이가 원하는 것들을 척척 알아맞추곤 한다. 그것은 언어라는 의사소통 수단이 단지 편리하게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일 뿐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같이 시간을 보내는것만으로 그렇게 아이의 상태를 알아 챌 수 있는 걸까? 혹은. 엄마라는 존재가 가지는 의미만으로 아이와 유전적이거나 상식 이상의 그 어떤 연결수단이 있어 아이와 소통이 가능한 것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상태를 끊임없이 살피고, 같은 과정과 여러가지 실수들을 반복하다가 얻어진 결과라는 것을 옆에서 봐왔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전적이거나 상식 이상의 연결 수단이 있다는 것도 맞지 않는 듯 하다. 워킹맘의 경우이거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를 키워주는 경우 오랜만에 만난 엄마와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사례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통량 보존의 법칙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정도. 정성을 쏟는 정도일거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아이는 자라면서 끊임없이 자기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현재 의사상태나 하고 싶은것, 불편한 것들에 대해서 소통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잠시 방심하거나 관심을 덜 가지는 상태가 되어버리면 금새 아이와의 소통에 문제가 생기는 상태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통량 보존의 법칙에 있어서 성인의 경우는 어떨까? 성인이 된 자들의 특성은 보통 자신이 하는 말이나 행동양식에 대해 극도의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특성이 있다. 자신이 말한것. 그리고 자신이 행동하는 것들에 대한 패턴을 상대방이 온전히 받아들여 수용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상대를 살피는데 시간을 투자하기 보다는 자신의 말을 하는데,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그런 자들이 아이를 대할때는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함으로 인해 소통이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고, 아이가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때 자신의 말을 주입하고, 그 말을 따르지 않았을때 거부감을 가지곤 한다.
소통량 보존의 법칙에서 상대의 상태를 살피고 의견을 들어주는 것은 필수이다. 사람은 기계처럼 단순하지 않아 끊임없이 감정상태가 변하고, 그 사람이 오늘 무엇을 했는지, 어떤 감정상태인지를 살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우리가 익숙한 '말'이란 언어로 표현을 한다고 하더라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통량 보존의 법칙에 있어서 '말'이란 의사소통 수단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올바른 소통을 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말'이란 수단을 단지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이 나눌수 있는 대화는 뻔할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말했지?' '야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냐' 등등이 주를 이루는 대화일 것이다.
소통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대화는 틀릴 것이다. '내가 그건 몰랐네?'라든지 '아.. 네가 그런 경험을 했고, 그래서 그런 감정이 들었구나. 좀 더 섬세하게 살펴야 했었는데.. 미안해~' 등등의 말들이 좀더 많은 비중을 차지 하지 않을까?
사춘기, 중2병, 갱년기 등등 변화무쌍한 과정을 표현하는 용어들이 존재한다. 그 과정은 마치 소통이 단절되는 시기를 뜻하는 것처럼 쓰여지는데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큰 변화를 겪고, 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것은 사실일테지만 소통량 보존의 법칙에서 본다면 항상 소통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일테니 말이다. 모쪼록 내가 발의한 소통량 보존의 법칙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여러가지 감정적 시도들을 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