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미학_완전과 불완전의 경계
오르골 멜로디 모차르트 레퀴엠. 오르골 소리는 언제 들어도 마음속 심연 어딘가에 있는 슬픔의 원액 주머니를 자극하는 느낌이다. K는 그 소리를 들으며 겨울철이 주는 축복인 오후 햇살을 음미하고 있다. 말에 좀 어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극도로 추운 날. 따사로운 햇살에 잘 말라가는 생선들이 보인다. 마르는 건지 어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 생선들을 먹었던 기억을 되살려보면 확실히 얼기보단 말랐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말라야 하는 것들이 유독 생선뿐일까?
K는 사랑하는 것들을 떠나보냈을 때를 생각한다.
풍요로운 감정으로 가득 찼던 시간이 지나가고 메마른 계절이 다가온다.
시간이란 마법은 각자의 인생의 전반에 걸쳐 펼쳐져 있기 때문에 매 순간을 뜻대로 보낼 수만은 없다.
'그래.. 저 생선처럼 말리곤 했었지.'
K는 독백처럼 읊조리고 나서 상념에 빠진다. 시야에서 45도 각도의 책상 신발주머니 걸이를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며 오만가지 생각에 잠겼던 그때처럼. 깊고 깊은 상념의 수렁에 빠진다. 결국 혼자가 되어야 했던 그 시간들을. 그 어떤 풍요로운 교감도 영원하지 않았고,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K는 풍요로운 바다를 기름지게 주름잡았을 그 튼실한 생선이 햇살에 마르고 있는 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한잔 술도 깨고 나면 그만이고~ 첫사랑의 알싸함도 지나고 나면 마치 없었던 일 같구나~ 사람의 삶이 쓸쓸해서 또 한잔 술을 기울이고~ 에그머니 술에 누가 약을 탄 것이냐. 머리가 희어지는 약을 탄 것이냐. 단지 한잔 술을 기울였을 뿐인데.. 변해버린 것들을 어이할꼬~'
주정뱅이의 노랫가락이 K의 폐부로 깊숙이 스며든다. 차가운 공기는 사람의 마음조차 얼리는 듯, 그 강력한 삶의 메시지를 담은 노랫가락에 사람들은 전혀 반응하지 않은 채 바삐 걸음을 재촉한다.
대체로 우리가 건강할 때 접하는 사람들은 대게 대중적이거나, 밝거나, 삶의 위기감에서 멀리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가끔 K와 같이 무척 어둡고, 마치 시한부 인생을 사는 듯이 매 순간순간이 간절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언젠가 K의 가장 친한 친구 J와 이야기하다가 K는 자신이 가장 무기력하다고 느낄 때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난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매 순간,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길을 따라가 보는 것이라 생각해. 그러기 위해서는 그 어떤 억압이나 간섭, 얽매여있는 조직의 스케줄에 좌우되서는 안 되지.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의 순간순간의 감정을 자주 묵살하곤 해. 근데 그러다가 내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순간이 있어. 나의 몸은 현재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데, 마음은 이미 하고자 하는 것을 동경하며 어딘가로 이탈하려 하는 거야. 현실에서의 무의미한 대화.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람들. 자기가 잘났다고 으스대며 침을 튀겨가며 말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끼리 살기 좋게 최적화시켜 만들어 놓은 공간에 내가 있는 것이 어색해서. 뜻대로 살 수 있다면 좀 더 내게 가치 있는 공간으로 떠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때의 자괴감. 떠나버린 영혼은 마치 내 육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멍해져 버리게 만들어 놓고. 난 마치 바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인생이라는 테트리스 게임 속에서 자신이 깃들어야 할 곳을 찾지 못한 블록은 느린 속도로 빈 공간을 헤매다가 시간에 쫓겨, 혹은 자신이 깃들 곳이라는 확신이 들 때엔 땅으로 꽂히게 된다. 박혀버린 도형은 움직일 수 없고, 살기 위해선 박힌 부분을 끊임없이 없애야 한다. 비우고 채우고.. 마치 우리의 인생처럼. 그 행위들을 반복하다가 결국 말없이 떠나야 한다.
자신에게 맞는 것들을 끊임없이 찾아 방황하다가 결국 그 생을 끝내는 것은 유독 사람만은 아니다. 돌 속에 뿌리를 박은 나무도, 끊임없이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지구의 맨틀도, 오염되었다 정화되었다를 반복하는 지구의 기후도.. 결국 현재 할 수 있는 행위들을 반복할 뿐이다.
나무는 잎이 가장 풍성할 때 그 잎을 떨어뜨리고, 몸통이 가장 단단하고 두꺼울 때 잘라 장작으로 만든다. 잘 말린 장작은 타기 시작하면서 매운 연기를 내며 잘 타지 않다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가장 아름답고 뜨거운 불길을 내뿜으며 타오른다. 불이 가장 절정일 때 나무는 이미 재가 되기 시작하고, 그 재는 가장 완전한 모습일 때 바람에 날려 무로 돌아간다. 그 어떤 것 하나 영원한 것은 없고, 잠시 거쳐지나 간 공간과.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