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방문실패기
오늘도 서론이 좀 길다. 오래 산 인생은 아니지만 평균수명이 80세 중후반 정도라고 보면 지금이 반환점을 돌아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하니 이렇게 많이 산건가 싶어서 조금 무섭다는 생각까지 든다. 걸어왔든 뛰어왔든 내가 왔던 길을 뒤돌아보면 나름 운이 따랐던 인생이라는 점을 부인할순 없다. 그리고 지금의 40대가 전반적으로 운이 있었던 세대냐고 묻는다면 그 무리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써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게 내 개인적인 입장인데 이 부분은 남의 떡이 커보일수 있으니 논외로 하자. 내 개인의 삶으로 한정해 보면 대단히 자주는 아니지만 소소한 행운들이 내 인생 곳곳에 자리잡고있다가 내가 좌절할 즈음되면 마치 네잎클로버처럼 나타나서 부스터 역할을 해서 크게 인생의 쓴 맛을 보지않고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그 첫번째가 대입이 아닌가 싶다. 수능이 끝나고 접수한 학교마다 줄줄이-줄줄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엔 가군, 나군, 다군으로 3군데를 지원할 수 있었고 가, 나 군에서는 이미 불합격소식을 들었고 예비후보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낙방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저 당구장에서 쓰리쿠션을 어떻게 쳐야 게임을 마무리하고 짜장면과 탕수육까지 더해진 게임지옥에서 벗어날수 있을지에만 몰두하고 있었고-내가 승부사 기질이 있는 에이스라는걸 그때 처음 알게됐다- 아마 그 즈음 담배라는 것도 피워본것 같다. 그렇게 당구장에서 천하태평으로 놀다가 찌든 담배냄새를 점퍼에 묻혀서 집에 돌아와보니 몇주동안 근심가득했던 가족들의 표정이 사뭇 달라서 의아해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합격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누가 보면 벼랑끝에서 살아난 거지만 난 내가 벼랑끝에 서 있다고 느끼지 않아서 가족들의 반응에 그저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얼렁뚱땅 대학을 들어가고 캠퍼스라는 곳을 대충 느껴보는 행운을 느껴보게 되었다.
두번째는 직장운인데 대학을 졸업하고나니 공부도 하지 않고 성적도 변변찮아서 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그렇게 몇개월을 한량처럼 살다가 선배 한명이 결혼한다길래 결혼식장에 갔다가 또다른 선배를 만났는데 그 선배가 자신의 거래선 한군데를 소개해주었고 그렇게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건 절대 행운이 아니었고 굳이 내가 운이 좋았다는 점을 찾자면 입사해서는 안될 회사를 초기에 맛보고 거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점이다. 그렇게 2년 정도 근무하고 탈출하려고 이직할 회사를 찾다가 화학제품을 트레이딩하는 중소기업을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해서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사뭇 진지한 그들의 마인드와 비지니스에 끌려 가벼운 마음으로 했던 이직이 내가 10년을 몸담게 했다는걸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인생은 나비효과가 아닌가 싶다. 그 회사와 인연이었다고 생각하는게 처음 면접을 보러가려는데 근무하던 회사일에서 훼방을 놓는 바람에 시간을 맞추지 못하게 되어 그냥 면접을 포기하려던 참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면접보려던 회사로 전화해서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 면접시간에 맞춰가지 못했는데 다른 일정을 알려주시면 시간을 내서 면접을 보러 가겠다고 했다. 근데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흔쾌히 면접일정을 조정해주어 결국은 면접을 봤고 면접후에도 내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는데 일주일 쯤 후에 함께 일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으니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은 꼭 남녀사이에만 쓰는건 아닌 모양이다.
내 삶을 함께 해온 행운을 가까운 과거로 돌아보면 4-5년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그동안 차근차근 준비과정을 거쳐서 막상 미국에 와보니 이거 뭐 내가 생각했던건 거의 허상이었고-그동안 돈쓰러 왔을때 미국과 돈을 벌러 왔을때 미국은 완전히 다르다-어떻게든 생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비자소지자들과 심지어 영주권자들도 새로운 상황에 직면한다. 한국에서 미국 이민을 준비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민 문호가 닫히거나 좁아지지 않나 걱정을 하게 되는데 나는 다행이 그 시기를 본의아니게 피할수 있게 되었고 운좋게도 내가 한국에 있을때 거래했던 제조사의 미국 지사에서 Sales manager로 근무할수 있게 되어 지금껏 해왔던 내 경력을 계속 이어갈수 있었다. 여기까진 적당히 타이밍이 맞았겠거니 할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미국생활이 2년쯤 지나갈때 좁은 아파트생활, 층간소음으로 인한 삶의 질 저하, 바퀴벌레와 함께 살면서도 하루가 멀다하고 올라가는 월세에 시달리느니 자가로 전환하는게 어떻겠느냐는 아내의 헛된-당시에는 상당히 헛된 생각처럼 보였다-바램에 집구경을 가는 정도로 호응을 해줬는데 점점 집구경을 다니다보니 집들이 맘에 들고 방음도 잘 되지 않는 좁은 아파트에 사는것 보다 널찍한 타운홈이나 싱글하우스에 살고 싶어졌다. 그렇게 고민하다보니 어느샌가 내 손에는 집열쇠가 쥐어져 있었다. 사실 주택을 구입하는건 행운이랄게 없지만 신용이 매우 중요한 미국에서 이민온지 2년만에 주택을 구입하기도 어렵지만 맘에 드는 집을 구입했고 그후로 Covid가 창궐하면서 지금은 내가 구입한 주택을 사려면 한참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내 이름으로 부동산이라는걸 처음 가져본 입장에서 집값이 오른게 운이 좋은게 아니라 적정 시장가격에 구입했다는 점이 다행스러운 점이고 이제는 누군가가 월세를 올려달라고 할 일도 없고 윗집의 소음에 잠을 설칠 필요도 없다는게 더더욱 다행스럽다. 그밖의 자질구레하게 줄줄이 운이 따랐던 일들은 지면관계상 생략해도 꽤 타이밍이 잘 맞은 인생을 살아온 것 처럼 보여서 여기서 줄인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는다며 내게 따르던 운을 지독히 부러워하던 누나의 말도 이젠 옛말이 되었고 내게 시기적절하게 따르던 행운도 끝난것 같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Covid로 어지간한 야외활동을 피하면서 동굴생활을 하던 내가 2021년 7월부터 백신접종자에 한해 해외입국자의 자가격리가 면제된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 또 조심하면서 추이를 지켜보다 이제는 괜찮겠지 싶어서 연말에 한국에 가려고 2주전에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는데 며칠전 오미크론변이 확산으로 인해 12월 3일-16일까지 자가격리면제를 한시적으로 중단한다는 청전벽력같은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 이렇게 절묘하게 운이 없을수가 있나. 한국에 다녀온지 만 3년이 되서 매년 가던 예전과 다르게 가족들이 보고싶고 친구들도 보고싶은데 갈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자가격리를 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얼마 안되는 휴가를 쪼개써야 하는 직장인의 입장에선 10일 격리면 가지 않는 편이 낫다.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라면 취소수수료 400불(200불X2인)이 면제되어 항공권을 취소해도 손해날게 없다는 점이다. 그 와중에 취소수수료로 지불할 400불을 벌었으니 이것도 운이 따른다고 해야 하는건가?
지금 내게 필요한건 네잎클로버같은 행운보다는 Covid 걱정없이, 마스크없이 마음대로 다닐수 있는 세잎클로버같은 평범한 행복이다. 갑자기 그럼 다섯잎클로버는 대박행운인가 하고 꽃말을 검색해보니 무섭게도 불행, 두려움이라고 나온걸 보니 네잎클로버처럼 적당히 그리고 평균보다 조금 더 가져야 행운인거지 너무 많이 가지면 빼앗길까봐 두려워서 불행해지는게 아닌가 싶다. 운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 모두 건강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