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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별하숙생 Nov 29. 2021

어느 신사생의 부고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우리 아버지는 1941년생 뱀띠로 올해 만 80세다. 그해는 신사년으로 그 다음 신사생은 아마도 60년 후인 2001년생으로 지금 만으로 스무살인 청년들일것이다. 목요일, 금요일 그리고 남은 추수감사절 연휴를 보내는 중에 카카오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가끔 연락하는 내 어린 시절 친구의 메시지였는데 내가 보낸 메시지에도 단답형으로 답하고 어지간해선 먼저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 그였기에 왠지 느낌이 편치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또다른 친구 아버지의 부고였다. 그 친구 역시 나와는 상당히 막역한 사이였고 중,고등학교, 스무살이 넘어서도 곧잘 친하게 어울렸던 친구였으나 대학진학과 함께 조금씩 멀어져 서른이 넘어서는 따로 연락한 적이 없고 고향에 내려가면 가끔 시내에서 마주치고 가볍게 안부를 묻는 정도였다. 결혼후엔 그 마저도 쉽지 않았고 이제는 내가 한국을 떠나있으니 좀 야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남같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 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긴 공백 탓에 이제 그 친구에게 연락을 하라고 하면 쉽사리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할것 같다. 하지만 그 친구와 나름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아버지가 신사생으로 동갑이었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같은 동네에서 각자 삶을 꾸려가고 있는 동갑내기로 그분은 시장에서 부부가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고 우리 집은 작은 운수사업을 하면서 신사생이라는 이름으로 그 당시 어른들이 많이하던 ‘동갑계원’들이었던거다. 그렇게 다달이 돈을 모아서 어느 정도 적립되면 어른들끼리 근처에 놀러갔다가 적당히 취해서 저녁늦게 집에 돌아오셨던 부모님들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무슨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그럴싸하게 아는 척을 잘하고 신변잡기에 능해서 각종 모임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그 아저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조박사”였다는 사실은 숨길 일도 아니었다. 그런 끼는 자식 대로 내려와 동갑내기 내 친구 역시 아버지 못지않은 입담과 숨은 재주들로 초,중,고등학교 내내 소풍이나 교내 행사에서 꽤나 인기를 얻었고 같은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는 없으니 그는 “조박사 주니어”였다. 어른들끼리의 교류도 있었고 서로의 집도 가까워 자연스럽게 왕래하며 친하게 지냈지만 세월이 흐르다보니 중,장년기를 함께 보내고 노년이 된 신사생들은 각자의 삶과 건강, 집안사정 등으로 더이상 동갑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그 분들 중의 일부는 병으로 인해 일찍 생을 마감하신 분도 있었던게 더 오랫동안 동갑내기들의 모임이 계속되지 못했던 원인이 아닐까 싶다. 우리 집도 줄곧 살아오던 시골동네를 2000년 후반부터 벗어나 그 동안 또 몇 번을 이사하게 되었고 그렇게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넘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부모님의 직업도 운수업을 하는 사업가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농사꾼으로 바뀌었으니 이런 소식을 사람들이 들으면 깜짝 놀라는걸 보면 세월이 얼마나 흘렀고 그 동안 연락과 왕래가 없었는지 짐작이 가능하리라.    

가장 가까운 뱀띠해는 2025년, 을사년. 

사실 마흔이 넘어가면서 종종 친구 부모님의 부고를 접하는 횟수가 잦아들고 이제는 내가 그런 나이가 되었구나 하고 슬픈 소식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어젯밤에 들려온 부고소식은 배겟잎에 머리만 닿으면 잠드는 내가 잠을 설칠 정도로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고인의 나이가 만으로 80세라 남성 평균수명인 84세에 근접했다고 볼수는 있겠지만 그의 집안은 대체로 건강한 집안이고 그 선대 역시 90세가 넘는 나이까지 장수하셨기에 고인 역시 오래 사시리라 기대했으니 상대적으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신듯 느껴진다. 갑작스런 부고소식에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꼬치꼬치 캐물을수 없어서 그냥 짐작만 하고 말았지만 이제는 이 모든 것들을, 세월이 그들을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게 서글프다. 이민온 지 고작 6년 정도밖에 안되었고 내 나이가 아직 젊어서 그런가 향수를 느낄 틈이 많지 않을 정도로 해야할 일들이 있어서 그동안 잊고 살았지만 이럴때는 정말이지 한국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에 있었더라도 자주 뵙지 않고 매년 농사일을 도와야 하니 오히려 귀찮게 생각했을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마음먹었을때 바로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다는 접근성은 넓디넓은 태평양을 마주하고 있는 미국에 사는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부러운 점이다. 올해 여름, 숨이 금방 가빠진다는 아버지의 말에 나이가 들고 어머니는 여름인데 누군들 호흡이 편하겠냐고 했지만 여러가지 다른 증상으로 미뤄보니 심부전증이 의심되어 서울의 큰 병원을 방문하여 코일시술을 받으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멀리 살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여전히 변이를 생산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있는 이 죽일 놈의 코로나바이러스도 야속하기 짝이 없다. 몇 십년간 쉴새없이 성장하고 편리하게 살아온 인류의 생활에 코로나바이러스는 아마 유래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상상할수 없을 정도의 영향과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전세계가 돌아가는 작금의 상황을 보면 아메리칸 드림은 예전의 그것처럼 좇아야 할 것은 아닌것이 확실해졌고 한국에서의 생활은 사람들이 버릇처럼 내뱉는 “헬”이라고 할만큼 정말 그렇게 형편없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근시일내에 한국에 돌아갈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나도 이제는 한국에서의 삶에 대해 더 자주 고민하는걸 보니 내 생각을 재고해봐야 할 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 그나저나 오늘은 부모님께 전화 한번 드려야겠다. 그리고 조문은 갈수 없지만 우리 아버지의 친구이자 “조박사”로 불리었던 신사생,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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