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이 놓고 간 압력밥솥
세상은 날이 갈수록 편리해지고 우리의 시간을 절약해주는 스마트한 물건들이 주변에 넘쳐난다. 삐딱하게 살기로 한건 아니지만 나는 수년전부터 이렇게 반문하곤 했다. 스마트한 물건들로 시간이 절약되면 그 절약한 시간엔 뭘 하는가? 그렇게 절약한 5분, 10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에 얼마나 생산적인 일을 할수 있는가? 당신이 대단히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면 당신이 옳으니 가던 길을 계속 가시라. 그렇지 않고 단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함이라면, 10분 정도 TV 더 보기 위해서라면, 조금 느긋하게 가면서 조금 더 괜찮은 결과물을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건 환영받지 못할 궤변일까. 뭐 대단하고 거창한 얘기는 아니고 내가 몇 년째 사용하는 우리집 압력밥솥 얘기다.
우리집 부엌의 전기밥솥은 아마 7-8년쯤 되었으니 소위 말하는 가전들 중 고참에 속한다. 한국에서 가져온 그릇 같은 것들에 비하면 지나온 세월이 반도 안되지만 미국에서 구입한 집기들 중에는 최고참 격이다. 한국에서도 같은 브랜드 전기밥솥을 사용했지만 미국엔 110볼트라 밥심으로 사는 나는 미국에 건너오자마자 제일 먼저 구입한 전기밥솥이다. 전기밥솥의 양대산맥이라 불리는 두 개의 브랜드 중 하나로 음성안내같은 첨단(?)기능은 없는 그저 기본기에 충실한 모델이었지만 밥은 곧잘 지어내서 그동안 우리 식구들이 편리하게 탄수화물을 섭취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근데 이 믿음직한 전기밥솥이 2-3년 전부터인가, 그것도 불규칙적으로 밥을 설익히는 실수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매번 그렇다면 고장이라 생각하고 고치면 되는데 10번에 1-2회 정도 밥을 망쳐버리는 예측불가능한 상황이 계속되니 어딜 찾아가서 고쳐야 될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써야 될지 고민스러웠다. 보통 퇴근하고 집에 와서 얼른 밥을 올리고 국거리나 반찬을 만들면 대략 7시쯤 저녁을 먹게 되고 남는 밥으로 다음날 점심도 준비를 하므로 전기밥솥이 족히 두 끼를 책임지게 되는데 이 녀석이 제 기능을 못하면 다음 날 점심메뉴까지 준비할 수 없는 매우 힘빠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밥이 설익는 상황을 처음 맞닥뜨리고 어떻게 해야 되나 황당함을 추스리려는 참에 수년전에 처형이 아이들과 토론토에 써머캠프와서 쓰다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우리 집에 놀러왔다가 짐만 될거 같다며 놓고간 중간 사이즈의 P브랜드 압력밥솥이 떠올라 거기에 밥을 옮겨 뚜껑을 닫고 좀 가열했더니 꽤 그럴싸하게 뜸이 들어 밥이 완성되었고 그 날 이후로 미덥지 못한 전기밥솥은 부엌 한켠으로 밀려나 버렸고 지금은 언제 퇴출되어도 이상할게 없는 위치에서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밥만 올려두면 30분 정도 후에 자동으로 밥을 지어내는 전기밥솥 대신 계속 붙어서 불조절도 해야되고 시간도 뜸들이는 시간까지 40-50분 정도 걸리는 압력솥을 사용하게 됐지만 밥짓는데 더 오랜 시간을 보내도 윤기가 흐르는 밥의 질은 전기밥솥에 비할바가 아니다. 압력솥으로 지어낸 잡곡밥으로 만족감이 높아져 이제는 자연스럽게 압력밥솥에 밥을 지어 먹는게 일상이 되었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무슨 밥 짓는데 한시간씩이나 쓰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10분의 주어진 시간동안 1분만에 100미터를 후다닥 달린 후에 9분 동안 땀을 닦으면서 쉴거라면, 반대로 5분동안 천천히 무리하지 않고 100미터를 달린 후에 남은 5분을 쉬는 데 써도 충분히 괜찮지 않겠냐고 자기합리화를 한다. 집에서 음식을 하기 시작한 언제부턴가 식사준비는 그냥 한 끼를 떼우는 과정이 아니라 바쁘지만 가족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므로 이런 정도의 저속운행은 아깝지 않다. 주변도 돌아볼 틈도 없이 5단 기어를 넣고 달리는걸 멈추고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연비는 낮을 지언정 저단기어에 동네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목적지까지 가보면 그것도 가끔은 할만하고 재미가 있다. 시간은 금이지만 한번쯤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는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