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편지 #12] 강남제비도 러브레터 쓰는 날

by 김저녁꽃

한로(寒露) 지나자 추워진다더니 종일 비가 내려 을씨년스러운 하루입니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보일러를 틀어서 실내온도를 22도에서 25도로 올렸습니다.


"한로 지나면 제비도 강남으로 간다"는 속담처럼 이제 여름옷을 옷장에 넣고 가을옷을 꺼내 입고 따뜻한 볕을 찾는 시기입니다. 강남으로 가면 좋겠지만 요즘 집 값이 너무 올라서 꿈도 꾸기 힘든 상황입니다. 강남 아파트에 둥지를 튼 제비집을 돈으로 환산하면 천만 원 정도 되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오늘은 브런치 작가로 선정된 날이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로또를 샀는데 5만원 짜리가 당첨된 느낌이랄까. 그 동안 서랍 속에 두었던 글 11편을 올렸더니 많은 분들이 '좋아요'를 눌러주셨습니다. 답례로 그분들 구독을 눌러드렸죠. 사람 사는 거 다 품앗이 아니겠습니까. ㅎ


지금은 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젊은 시절 다짐했던 것 중 하나가 편지 100통을 보낼 수 있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1993년 11월 13일 운명처럼 그 사람을 만났고, 지금 저의 아내가 되어 있습니다.


그때 쓴 편지 200통 가량이 집 구석 어디에 박스에 담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번도 그것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아주 가끔 아이들이 연애편지를 꺼내 놀리듯 읽을 때면, 온 가족이 오글거리다 웃음을 터트립니다.


밤새 쓴 편지를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마냥 품안에 넣고 가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밤이면 어김없이 파가니니를 들으며 편지를 썼죠. 이런 느낌을 잘 표현한 시가 김사인 시인의 '밤에 쓰는 편지 1' 인듯 합니다.


밤에 쓰는 편지 1


그대로 하여

저에게 이런 밤이 있습니다


오늘따라 비까지 내려

오가는 사람들은 더 바삐 서두르고

우산이 없는 여학생 아이들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울상입니다.

팔다리가 있는 짐승들은 모두

어디로 총총히 돌아갑니다


그러나 저기

몇 안 남은 잎을 바람에 마저 맡기고

묵묵히 밤을 견디는 나무들 있습니다

빛바랜 머리칼로 찬비 견디는 풀잎들이 있습니다


그대로 하여

저에게 쓰거운 희망의 밤이 있습니다



여기서 '쓰거운'이라는 말을 찾아보니 '쓰다'의 함경도 방언이라고 합니다. 쓰고 차가운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누군가가 있어) "쓰겁지만 희망의 밤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 듯 합니다.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입니다. 가을비에 젖은 몸을 말리고 보일러 온도를 한껏 올려두세요. 그리고 따뜻한 강남 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군가에게 편지 한 장 쓰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제비도 오늘 같은 날은 둥지에서 부리로 편지 한 장 쓰지 않을까요. 콕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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