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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저녁꽃 Oct 28. 2021

[자서전 편지#17] 가슴 속 천불 나는 '설악 단풍'

엊그제 설악산 단풍구경을 다녀왔습니다. 원래는 오색약수터에서 대청봉을 오른 후 천불동계곡으로 내려오는 일정이었는데, 일행들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신흥사에서 천불동 계곡을 왕복 5시간 가량 걸었습니다.


설악산은 고2 수학여행 때 흔들바위를 보러 온 것이 전부였습니다. 40년 만에 방문한 설악산은 평일인데도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수학여행 때는 봉투에 담긴 에델바이스를 샀었는데, 지금은 팔지 않는 듯 했습니다.


케이블카를 타는 가족, 신흥사 절을 거닐거나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천불동 계곡 코스는 그리 험하지 않아 산책하듯 걷기에 안성맞춤입니다. 계곡을 따라 3.5km를 걸어서 양폭대피소까지 다녀왔습니다.


그야말로 천의 부처가 곳곳에 내려앉은 듯 기암절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설악산 설악산 하는구나'를 깨달았습니다. 단풍은 또한 가슴 속에서 천불이 일듯 울긋불긋 애간장을 녹입니다.


천불동 계곡 기암절벽


단풍을 노래한 시는 많지만 오늘은 백석의 '단풍'을 읽어볼까 합니다. 이북이 고향이어서 아마 설악의 단풍과 정취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단풍


빨간 물 짙게 든 얼굴이 아름답지 않으뇨 

빨간 정 무르녹는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뇨

단풍든 시절은 새빨간 웃음을 웃고 새빨간 말을 지줄댄다  어데 청춘을 보낸 서러움이 있느뇨 

어데 노사(老死)를 앞둘 두려움이 있느뇨 

재화가 한끝 풍성하야 시월 햇살이 무색하다

사랑에 한창 익어서 살찐 띠몸이 불탄다

영화의 자랑이 한창 현란해서 청청한울이 눈부셔 한다

시월 시절은 단풍이 얼굴이요, 또 마음인데 시월단풍도 높다란 낭떨어지에 두서너 나무 깨웃듬이 외로히 서서 흔들거리는 것이 기로다 

시월 단풍은 아름다우나 사랑하기를 삼갈 것이니 울어서도 다하지 못한 독한 원한이 빨간 자주로 지지우리지 않느뇨 





백석이 1937년 함흥 귀주사 단풍을 보고 지은 시라고 합니다. '가을의 표정'이라은 부제로 약간 산문식으로 쓴 시인데, 인간사 칠정오욕이 다 담긴 듯합니다. 시월 단풍이 사랑의 살진 얼굴이요, 또 마음이라는 표현이 참 아름답습니다. 


찬란한 청춘은 곧 지겠지만 후회 없이 살고 사랑하였으므로, 그 삶의 단풍 빛은 빨간 자주색으로 지워지지 않을 만큼 영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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