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편지 #16] 볼 빨개진 '명자누나 우체국'

by 김저녁꽃

때이른 가을 추위로 겨울 옷을 준비하고 내복까지 챙겨 입었습니다. 이러다 가을 없이 그냥 겨울로 바로 직행하는 것은 아닌 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여름 옷을 세탁소에 맡기고 왔습니다. 엉덩이가 후줄근한 바지를 보면서 '올 여름 더위로 고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들으며 볕이 따뜻한 곳에서 차를 마시기 딱 좋은 계절입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죠.


요즘에는 우체국에 편지보다는 택배를 부치러 많이 갑니다. 예전에는 밤새 쓴 편지에 문방구에서 미리 사둔 우표를 붙인 뒤 우체국 앞 우체통에 넣곤 했었죠. 길가에 우체통도 많이 있었고요.


어느 우체국이나 가면 꼭 빨간 이 꽃이 있었는데, 이름을 몰랐었습니다. 그러다 송재학 시인의 '명자나무 우체국'을 읽고서야 그 꽃인 줄 알게됐습니다.



명자나무 우체국


올해도 어김없이 편지를 받았다

봉투 속에 고요히 접힌 다섯 장의 붉은 태지(苔紙)도 여전하다

화두(花頭) 문자로 씌어진 편지를 읽으려면

예의 붉은별무늬병의 가시를 조심해야 하지만

장미과의 꽃나무를 그냥 지나칠 순 없다

느리고 쉼 없이 편지를 전해주는 건

역시 키 작은 명자나무 우체국,

그 우체국장 아가씨의 단내 나는 입냄새와 함께

명자나무 꽃을 석삼년째 기다리노라면,

피돌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아가미로 숨쉬니까

떨림과 수줍음이란 이렇듯 불그스레한 투명으로부터 시작된다

명자나무 앞 웅덩이에 낮달이 머물면

붉은머리오목눈이의 종종걸음은 우표를 찍어낸다

우체통이 반듯한 붉은색이듯

단층 우체국의 적벽돌에서 피어나는 건 아지랑이,

연금술을 믿으니까

명자나무 우체국의 장기 저축 상품을 사러 간다



그 우체국장 이름도 아마 명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박명자, 이명자, 최명자, 손명자... 그러다 결명자까지..

아직 시집을 가지 못한 볼 빨간 동네 누나 같은 우체국.

연애편지라도 부치러 가면 얼굴이 후끈거려 건물 밖 우체통에 얼른 던져놓고 갈 법한 곳.

도망치다 한쪽 신발이 벗겨져서 주워 신는 순간,

어디서 날아왔는지 붉은머리 오목눈이 새가 부리로 톡톡 빨간 직인을 찍어줄 것만 같은,

그런 가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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