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실 아직은 다시 일할 용기가 안 나요

3개월 차 갭이어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셀프 인터뷰

by 깨알쟁이

사실 전 아직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회사에 나가서 일할 용기요.



저는 이제 막 퇴사한 지 3개월이 되었는데 아주 게으르지도 아주 치열하지도 않게 살아가는 중입니다.

백수라고 하기엔 초라하고 프리랜서 마케터라고 하기엔 너무 과장되어 보여 갭이어라고 정의를 내리기로 했습니다.


주로 뭐 하면서 보내는데요?

사실 취업준비는 굉장히 소극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맞지만 아직 돈 말고는 크게 동기부여가 생기질 않아요. 재미가 없다는 소리겠죠.

그래도 나름 균형 있는 한 주 한 주를 보내는 것도 같습니다.

일주일에 적어도 2권 정도의 책을 읽고 주 2회 이상 운동을 하고, 술도 줄이고 커피도 줄였습니다.

건전한 취미로는 야구를 주 6일 챙겨 보고 도서관에도 종종 출석합니다.

본가에도 자주 방문해 부모님과도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중이구요.

아참, 외식도 많이 하지 않고 집에서 주로 끼니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직접 만든 음식으로요.


사실 퇴사하면 늘어져서 집에서 TV만 볼 것도 같았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는 않나 봐요.

제 자신을 지속적으로 들들 볶으며 쪼는 편이어서 그런지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것은 저에게 시간을 허비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 일 할 용기가 나지 않을까요?


남의 이야기를 잘 따라주고 제 의견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저도 사실은 고집이 있고 제 주관이 강한 편입니다. 가장 큰 부분 중 하나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창 시절에도 그랬던 것 같아요. 과학은 너무 재미가 없어서 어렵게만 느껴지고 그에 비해 수학은 또 너무 재밌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일 때는 이과가 지금처럼 인기를 받지 못하던 시절이지만 만약 제가 취업을 생각했더라면 재미없어 좋아하지 않던 과학을 꾸역꾸역 공부하며 이과를 선택했겠죠? 근데 재미가 없는 것에 다시 재미 붙이기는 어려웠나 봐요. 그래서 이과를 포기하고 문과를 택해 경제학도가 되었어요.


약 20년이 지났지만 지금의 저도 별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제가 재밌다고 생각해야 가속 페달을 밟고 달리는데 재미있게 생각하는 부분이 1도 없다고 느껴지면 자물쇠를 채워버리기 일쑤입니다. 쓸데없는 아집이죠..


그렇다고 해서 제가 거창한 재미를 바라지는 않아요.

전전 회사에서 상품 BM으로 일하면서 은행 사이트에 접속해 외화 송금까지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다른 동료들은 '아 우리가 왜 이런 것까지 해야 해. 나는 해외 브랜드 바이어인데, 이건 회계팀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지만 저는 또 특이하게도 '아 이건 좀 아이러니한데 은행 업무 은근히 재밌는데? 이것도 상품이 잘 출시될 수 있도록 하는 업무 중 하나잖아! 난 이게 너무 재밌어. 사실 이건 나의 불만 사항이 아니야.'라고 생각한 사람이에요.


지난 회사에서 마케터로 일할 때에도 우연히 얻은 기회로 뜻밖의 재능 및 재미를 발견한 적이 있었어요. 어느 동물병원에서 5-10분 정도 제품 소개 세미나를 해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고 흔쾌히 출동했는데, 40명 정도 보호자 및 수의사 선생님들 앞에서 발표를 하며 다리도 떨리고 심장도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떨렸어요. 그런데 작은 무대였지만 사람들 앞에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눈 마주치며 알리고 경청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되게 뿌듯하고 재밌더라고요. 큰 눈동자를 갖고 있어 긴장하는 게 다 티가 날 법도 한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긴장도 안 하고 어떻게 그렇게 잘하셔요'라고 나이스한 평가까지 해주셔서 '뭐야, 나 발표 잘하는 사람이었어? 이럴 거면 대학교 때 팀플 수업 많이 들어볼걸.'이라는 귀여운 후회도 해본 적이 있어요.

감사하게도 그 한 번의 세미나로 물꼬를 터서 그 이후에 5번 정도 더 병원에서 세미나 발표 시간을 가졌고 이후에는 캣페어에서 유료 세미나 강단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어요! 할 때마다 떨리긴 매한가지지만 하고 나면 너무너무 재밌던 일이었어요.


다시 재미를 찾으면 되지 않을까요? 일터에서?


그러면 '다시 일터에서 재미를 찾아가면 되지 않나요?'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제가 잘할 수 있는 일, 재밌어하는 일을 다시 찾으면 돼요.

고통스럽지만 글을 쓰거나 말을 하며 설득하는 일, 고객을 직접 만나는 일이요. 제가 해오던 일이요.

근데 왜 그럴까요? 아직도 마음 한 켠에서는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진짜 마케팅 리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B2B에 치중해 있었고 특정 산업군에만 있었는데, 나는 일반 소비재 분야에서도 마케터로서 과연 쓸만한 사람일까?'

아마도 저는 제가 주체적으로 재미를 찾기보다는 아직도 '남의 시선, 남의 평가'가 두렵나 봐요.

어떤 산업군이든 제가 해오던 일을 소개하고 저라는 사람을 어필하면 되는데 아직 두려워요.

재미있는 일만 할 수도 없는 레벨에 다다르기도 했고, 부정적인 생각으로만 머릿속에서 순환시킵니다.

어떻게 저 좋은 일만 하면서 사냐->그럼 내가 못 하는 일도 보완해야 하지->근데 나 그 경험이 별로 없는데 어떻게 하지?->이런 나를 받아줄까?


사실은 여전히 상사의 피드백이 무섭기도 해요


재미도 재미지만 사실 여전히 상사의 피드백이 무서운 사람이에요.

사회생활 10년 했다면서 피드백이 무섭다는 말 너무 우습게 들리시죠? 네, 웃고 가세요. 이게 저라는 사람이니까요.

제가 훗날 사회에서 어떻게 쓰임을 받을지는 몰라도 공교롭게 전 회사와 전전회사에서 모두 직속 상사가 사장님이었어요. 한 번은 오너, 한 번은 한국 지사장님이요.

저는 타인의 반응에 워낙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고 그들이 가진 타이틀이 무엇이냐도 한몫하는 것 같더라고요. 다른 동료들처럼 사장님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제가 하고자 하는 방향을 제안하고 발표하고 모르는 것은 물어보면 되는데, 어렵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어차피 제일 윗 사람인 사장님이 최종 결정을 하겠지.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라고 스스로를 자꾸 작게 만들어서인지.. 상사가 사장님이었던 것이 저에게는 꽤나 어려운 부분이었어요.


그리고 저 사실 가끔 '일잘러가 말해주는 회사생활 팁' 이런 것들을 보면 괴로워서 숨이 막혀올 때도 있어요.

중간보고가 중요하다, 모르면 물어보면서 해라, 다 하고 가져가서 남들의 일을 2-3배 늘리지 말라.

이런 교과서에 쓰여있을 법한 말들 저도 잘 알거든요?

근데 그 선을 제가 늘 틀렸는지, 아니면 제가 늘 자신 없는 태도로 말하고 행동해서였는지, 아니면 제가 가져가는 질문들이 죄다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중간에 모르는 것을 가져가면 '네가 매니저인데 나한테 자꾸 질문하면 어떻게 하냐. 자꾸 나한테 질문하지 말아라.'라는 피드백을 종종 받았어요.

그러다 보면 주눅이 들고 '아 또 안 되겠지. 나는 잘 모르는데 질문하지 말라니. 그럼 일단 주변에 물어보고 내 방식대로 완성해 가야겠다.' 하고 완성을 해가면, '왜 네 멋대로 했냐. 내 말은 이게 아니지 않냐.'라는 피드백도 받아왔어요. 물론 초 마이크로 매니징의 상사에게 서요.


일개 사원이면서 직속 사수가 있을 때에는 그런 평까지는 못 받았거든요. 근데 사장님이 상사가 되었을 때에는 종종 이런 피드백을 받아왔다 보니, 비슷한 상황에 놓일 때에도 늘 머릿속에는 '아 이거 왜 질문하냐고 하겠지? 아 난 그럼 어떻게 하냐... 물어볼 곳이 정말 없는데.......' 하면서 백번 천 번 바보같이 고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쓰다 보니 느낀 것은, 아마도 저는 그런 제 바보 같은 모습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한 것 같아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건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제가 얼마나 나아졌을까 의문이 들기도 해서요.

그래서 다시 회사라는 공간에 들어가기가 두려운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살 거예요?
뭐라도 계획이 있나요?



아직은 회복이 필요한 것 같아요. 비워내는 시간이요.

연애도 이직도 요즘은 '환승'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중간에 텀을 두지 않고 환승연애, 환승이직을 하는 것이 낫다고 많이들 생각하시는 것은 압니다. 면접장에 갔을 때나 이력서를 제출할 때에도 공백기가 보이면 한 번도 빠짐없이 하는 질문이잖아요.

"왜 구해놓지 않고 퇴사했나요? (=뭐 전 회사에서 문제라도 있었나요?)"

"그거 되게 대단한 용기인데 (=대책 없어 보이는데) 그럼 공백기에는 무얼 하며 보내고 있나요? (=그냥 시간을 허송세월 보낸 건 아닌가요?"


다 알아요. 안다고요. 근데 저에게는 아직 조금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이 저에게 가장 좋은 해결책인지 그 방법은 완벽히 모르겠지만 (최대한 돈이 많이 안 들었으면 좋겠지만요) 제가 전보다 더 잘 버틸 수 있는 힘을 기르고 버틸 이유를 더 만드는 거예요. 그게 독서일 수도 있고 요리일 수도 있고요. 이렇게 글 쓰면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운동도요.


한 때에는 마케팅, 브랜딩, 기획, 전략 등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어요. 출퇴근하면서 대중교통에서 읽고 집에 와서도 짬 내서 읽으며 직업인으로서 내 역량을 강화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해오던 저인데 정작 제 자신에게 버티는 역량, 이겨내는 힘을 길러줄 생각은 그다지 하지 않았더라구요.

물론 천성이 강하고 자기주장을 잘 피력하고 남에게 상처받지 않고 할 일만 똑 부러지게 잘하는 사람이면 그런 시간이 굳이 필요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저는 제가 그렇지 않은 사람인 것을 알아버렸고 커리어 하이를 찍기 위해 쉼 없이 올라가기보다는 잠시 인생의 오두막에서 재정비할 시간이 아직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그러면
취업하는 것 이외에 하고 싶은 것은 있나요?



당연히 있죠! 가족들의 동의도 구해야 할 것 같아 저 혼자 결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1. 디지털 노마드로 살기

- 직접 컨텐츠 제작 (블로그, 영상 등) 및 블로그 운영

- 컨텐츠 제작 및 블로그 관리 대행

2. 해외 브랜드 소싱 및 판매

- 소싱만 해서 도매상 구하기

- 소싱, 판매 올인원 다 하기

3. 기타 창작자의 삶

- 영상 제작, 작곡

- 에세이북, 자기 계발 서적 발간 등

4. 정리 전문가 되기

- 자격증 취득

- 프리랜서 정리 전문가로 활동


일단은 이렇게 구상해 보긴 했어요.

이 중 현실과 가장 가까운 것은 1번이긴 합니다.

지금도 하고 있고 지금보다 조금 더 열심히 체계적으로 한다면 그래도 제 손으로 관리비, 보험료, 적금, 생활비는 벌 수 있지 않을까.. 1차 목표를 생각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세 가지 말을 해주고 싶은데요. (욕심도 참 많죠^^)


우선 너를 너무 몰아세우지 말아라.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 꼭 남들처럼 모든 것을 세세하게 계획 짜고 실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 편한 방법대로 방향으로 후회 없이 시간을 보내라.


너무 돈돈 거리면 금방 지친다. 네 말대로 재미를 먼저 찾아라. 오래가려면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을 붙잡아야 한다. 돈이 없어서, 돈이 나가서, 돈이 많이 들어서.. 쓸데없는 곳에 쓰지 않아야 하는 것이 돈이지, 모든 곳에 아끼라는 것은 아니다. 내 미래를 위해 투자가 필요한 부분이라면 합리적인 선 안에서 쓰고 투자하자.

그리고 천 원, 이천 원.. 지금 들어오는 소소한 광고비에 목숨 걸지 말고 더 멀리 바라보자.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 말아라. 충분히 인정받아 왔고 잠재력도 충분하다. 최근에 만나본 면접관들이 한 말들을 너무 마음속에 새겨두지 말아라. 신입도 아니고 경력직이다. 그들도 나를 선택할 권리가 있지만 나 또한 회사를 선택해서 갈지 말지 결정하는 것이다. 나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곳에서 했던 이야기들을 너무 마음속에 오래 두지 말아라. 그리고 아직 가보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 '난 안 되겠지.' 자꾸 좌절감을 심을 거라면 차라리 아무 생각을 하지 말아라. 어차피 어디든 무엇이든 가장 좋은 길이 나의 길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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