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진 그릇을 쌓으면 일이 두 배가 돼

괴물로 만드는 설거지 시간

by 깨알쟁이

생각보다 기분은 작은 걸로 좌지우지된다. 3,000원짜리 스티커 하나 예쁜 것을 사서 다이어리에 붙일 때 내가 뭐라도 된 것 마냥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쁘고 행복했다. 반면 생각보다 별거 아닌 걸로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요리하고 식사도 모두 마친 후 설거지를 할 때다. 더 디테일하게 말하면 무거운 그릇이나 팬을 닦는데 기름기가 잘 제거되지 않아서 계속 들고 있어야 할 때. 박박 닦는데도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을 때 짜증이 올라온다. 나아가서는 기름진 그릇을 겹쳐 올려두면 안 그래도 안 쪽 닦기도 힘든데 밑바닥까지도 힘을 들여 닦아야 한다. 방금 전에 그랬다. 무거운 프라이팬, 무거운 르쿠르제 그릇. 하나같이 기름져 있는데 차곡차곡 쌓여있기까지 해서 설거지하는 내내 들숨엔 눈물 날숨엔 콧물이 함께했다. 설거지를 할 때 이렇게 짜증이 유독 더 올라오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쾅 쾅 개수대에서 소리를 내곤 한다. 그 모습을 내가 보면서 너무 괴물 같아서 더 울었다.

설거지해줄 거라는 약속 겨우 받아냈지만 코 고는 소리만 듣게 되어 이런 걸까. 밥 차리는 것도 치우는 것도 결국 평생 다 내 몫임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을 마주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오늘 아침 6시부터 아파트 단지 전체 정전됐다고 자동 발신으로 전화해서 1시간이나 먼저 강제로 기상시킨 관리사무소 때문일까. 아니면 오늘 창피한 경기력으로 제대로 완패를 보여준 우리 야구팀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괴물같이 변한 나 자신 때문이 아니라고 누군가가 말해줬으면 좋겠다. 제발 이럴 땐 그냥 속 편히 남 탓 좀 하고 싶다. 제발.


오늘 하루 사랑 많이 받아 행복한 하루였다고 임시저장에 글 남겨둔 게 불과 5시간 전이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나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탈 일인가 이게?

내일은 의식적으로라도 기름진 거 안 먹을 거다. 설거지도 최소화할 거고 그냥 남이 해준 거 사 먹을래. 설거지하다가 자꾸 괴물같이 변하는 내 모습 나도 봐주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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