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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성화 Dec 30. 2023

<노량:죽음의 바다> 왜 자꾸 보게 될까?

올 겨울 내내 가슴을 뜨겁게 달굴 이순신 장군의 영화

한 인물을 배우를 바꾸어 가면서 그 역할을
하는 위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들에게는 정말 꺼지지 않는
횃불 같은 분인데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구한
정말 훌륭한 군인이셨다.
 
여기에 가장 초점을 맞춘 것 같습니다.

차가운 겨울 바다의 전투지만
용광로처럼 뜨거운 어떤 기운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이순신 장군 역을 맡은 김윤석 배우의 말이다.



오늘 노량-죽음의 바다를 보고 왔다.

한 영화를 극장에서 두 번, 세 번 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게 만든 영화는 과연 몇 편이나 될까?



나는 오늘 두 번째 보았다.

처음 이렇게 해 보았다.

그리고 또 볼 것이다. 그만큼 가치가 있고 보면 볼수록 더 자세히 더 밀도 있게 보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가 뒷받침이 되어주는 영화는 그래서 계속 볼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전개 과정(1592. 4 ~ 1598. 11 / 7년 전쟁)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명나라-조선-일본, 삼국의 힘겨운 싸움이 계속되던 중 1598년 음력 8월 18일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사망.


유언으로 남긴 철군 명령에 따라 대부분의 일본군은 철수를 했는데요.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 병력은 전라도 순천에 묶여 있었습니다.

곱게 일본으로 돌려보낼 마음이 전혀 없는 이순신 앞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죠.


결국 조선과 명나라의 수군에 의해 빠져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무사히 일본으로 도망가기 위해 왜 수군의 최고 지휘관인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는 경남 사천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은 모든 걸 꿰뚫고 있는 장군입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도 매일매일 일기를 쓰고 고민하고 병법서를 보면서 연구하고 전쟁을 대비해 철저히 훈련하고 했던 것들이 빛을 발하는 것이지요!


-삼도 수군통제사란?

경상•전라•충청도 등 3도의 수군을 지휘 통솔하는 삼남 지방의 수군 총사령관. 임진왜란 때 새로 만들어진 관직으로, 전 수군을 통솔하며 왜적의 침입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고자 만든 것.




시마즈 함대가 노량(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앞바다 일대)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명나라 도독 진린에게 남해도 서북쪽 죽도 뒤편에서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우리 수군은 일단 봉쇄망을 푼 후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밤 10시경 남해도 서북단인 관음포에 몰래 숨어 있었지요.


이곳
남해도 노량에서 적들을 맞이할 것이오.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카)이 우리가 광양만을 떠났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없게 할 것이요.

장시간이면 그럴 수 없겠지!
하여 이번 싸움은 무엇보다
속전속결로 끝내는 것이 중요하오.

창선도의 적은 분명 밤안개를 타고
노량으로 올 것이다.
노량에서 대적하다 해가 뜨기 전까지 필히
이곳까지 끌고 내려와 섬멸시켜야 한다.
해가 뜨기 전까지 필히 이곳(관음포)까지
끌고 내려와 섬멸시켜야 한다.




이튿날인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새벽 4시경, 시마즈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숨어 있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순신 함대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일본은 수적인 우세로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지만 퇴로가 막힌 관음포였기 때문에 일본 측이 포위공격을 당하지요.


같은 날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고 이미 200여 척이 깨지고 150여 척이 파손돼서 싸움에 질 기미가 짙어지자 일본 수군은 남은 배 150여 척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려 시도했습니다.

조명 연합함대는 오후 12시경까지 남은 적들을 소탕(휩쓸어 죄다 없애 버림)하며 추격을 계속하였습니다.


이때,

도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이순신 장군은 관음포에서 왼쪽 겨드랑이 부분을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습니다. 곁에 있던 첫째 아들 회와 조카 완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어록
지금 싸움이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


이 유언을 남기고 바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 회와 조카 완, 그리고 송희립 장군 등이 독전(督戰, 싸움을 감독하고 사기를 북돋워 줌)하여 왜선 5백 여척과 싸워 2백 여척을 격침시켰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 역시도 추격 도중에 전사하였다고 해요.


영화에서 등자룡 역의 허준호 배우와 이순신 역의 김윤석 배우의 눈빛 교환이 그렇게 믿음직하고 감동적일 수가 없었는데요..


바로 이 영상입니다.




조명연합군(이순신 장군, 명나라 도독 진린)

일본의 시마즈 요시히로


일본군 함대는 200여 척 침몰, 병사 1만여 명 사망

고니시 유키나카는 노량 해전이 벌어지는 틈을 타서 유유히 빠져나갔습니다.


결과는 조-명 연합군의 승리

7년 전쟁의 끝!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최후의 해전, 죽음의 바다 노량!

먹먹하고 슬픔에 잠겨 영화가 끝났는데도 바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을 봐도 그러네요.


국사책에서는 알지 못했던 노량 해전의 급박한 순간을

<노량:죽음의 바다> 덕분에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인물됨과 사람다운 사람, 누구보다 백성을 아끼고 사람에게 신뢰는 어떻게 얻는 것인지 알게 해 준 영화였습니다.


또한 나라를 생각하고 진정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그 속에서 수많은 고뇌와 갈등을 어떻게 견뎌냈는지도 영화가 아니었다면 대중들이 과연 깊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감히 저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느낄 수 있었는데요.



[난중일기]를 2017년에 사놓고 지금까지 책장에 고이 모셔두고만 있었습니다. 영화가 큰 동기부여를 주어 책을 펼치게 되었네요. 아이들에게 사 주었던 이순신과 관련된 책들도 이번 기회에 다시 보고 같이 또 읽어보고 몇 년 전에 보았던 EBS 한국사 수험서도 오랜만에 다시 보았습니다. 잘 만든 영화는 이렇게 영향력이 큽니다.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을 것 같아요. 아이들도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 이야기를 계속해서 합니다. 가슴으로 느끼기에는 영화만 한 게 없고 책을 다시 펼치게까지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무술년(1598년) 2월 18일 이순신이 보화도에서 고금도로 진영을 옮기고, 7월 16일 명나라 도독 진린(陳璘, 1543년 ~ 1607년)과 연합작전을 세웠다. 24일 절이도 해전에서 송여종이 포획해 온 적선 6척과 적군의 머리 69급을 진린에게 주었다. 10월 2일 왜교 전투에서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 1558 ~ 1619년)과 협공하고 고니시 유키나가 생포작전을 벌였다. 19일 뇌물을 받은 진린이 왜선을 통과시키고, 노량에서 왜군이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한 구출작전을 벌였다. 이순신이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무술년 11월 8일(1598년 음력 11월 8일)

-노량해전 11일 전

명나라 도독부에 가서 위로연을 베풀어 종일 술을 마시고 어두워져서야 돌아왔다. 잠시 후 도독(진린)이 보기를 청하기에 바로 나아갔다. 도독이 말하기를, “순천 왜교의 적들이 10일 사이에 철수하여 도망한다고 기별이 육지로부터 급히 전해왔으니,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자.”고 하였다.


9일-노량해전 10일 전

도독과 함께 일시에 군대를 움직여서 백서량(여수 남면 횡간도)에 가서 진을 쳤다.

10일 좌수영 앞바다에 가서 진을 쳤다.

11일 묘도에 가서 진을 쳤다.

‘난중잡록’ 기록 중

12일 행장이 먼저 왜선 10여 척을 출발시켜 묘도 밖에 이르니, 우리 수군이 모두 쳐부수어 죽였다는 기록이 있음.


13일-노량해전 6일 전

왜선 10여 척이 장도(여수 율촌면)에 모습을 드러내어 곧바로 도독과 약속하고 수군을 거느리고 쫓아갔다. 왜선은 물러나 움츠리고 온종일 나오지 않았다. 도독과 함께 장도로 돌아와 진을 쳤다.


14일-노량해전 5일 전

왜선 2척이 강화할 일로 중류로 나오니, 도독이 왜통사(왜통역관)를 시켜 왜선을 맞이하고, 조용히 한 개의 홍기와 환도 등의 물건을 받았다. 술시에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와서 돼지 2마리와 술 2동이를 도독에게 바쳤다고 한다.


15일-노량해전 4일 전

이른 아침에 도독에게 가보고 잠시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왜선 2척이 강화할 일로 재삼 도독의 진중에 드나들었다.


16일-노량해전 3일 전

도독이 진문동을 왜군의 진영에 들여보냈는데, 얼마 뒤 왜선 3척이 말 한 필과 창, 칼 등의 물품을 가져와 도독에게 바쳤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수군의 제지로 탈출이 어렵게 되자, 진린에게 수차례 뇌물을 보내어 도움을 청했다. 왜인 통사를 통해 은 백냥과 보검 50구를 진인에게 바치며 “전쟁에는 피를 보지 않는 것을 귀히 여기니, 길을 빌려 주어 환국하게 해 주시오.”하자, 진린이 허락하였다. 그러나 보낸 배 여러 척을 이순신이 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유키나가가 진인에게 항의하자, 진인은 “내가 알 바 아니오. 이것은 통제사 이순신이 한 것이오.”라고 하였다.


17일-노량해전 2일 전(마지막 일기)

어제 복병장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간 배 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올 때 한산도 앞바다로 쫓아갔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 했다.



덕분에 전쟁 2일 전까지의 기록을 봅니다. 최고 지휘관이 직접 참전하며 쓴 기록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실시간으로 기록한 일기 속에서 당시 전쟁의 실제 상황은 물론, 주변과 사회 및 조정의 사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알 수 있습니다.


요즘 경제, 전쟁, 환경 등 전 세계가 위기이고 힘든 시기잖아요. 동서고금의 수많은 위인 중에서도 이럴 때마다 첫 번째로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이라고 합니다. 430년 가까이 되는 지금도 우리가 여전히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고 10년 동안 배우를 바꿔가면서 ‘이순신 3부작’으로도 영화가 나왔다는 건 그만큼 이순신 장군의 인물됨됨이와 남다른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이 위기 때마다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기 때문입니다.




장군으로서는 용맹하고 강인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 이순신!

그를 따르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항왜 준사와 주고받은 짧은 대화가 가슴에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아요.


준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냐?

다른 왜인들처럼 고향으로 가고 싶다면 그리 하거라.

윗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향이란.. 전쟁이 끝나야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전쟁이 끝나면 그리 하겠습니다.


목숨을 걸지는 마라
행장의 함대가 출정하는 즉시 내게 보고만 하면 된다. 알겠느냐


희립아! 어서 배를 돌려라
진도독을 구해야 한다!

배들이 너무 엉켜 있습니다
후미 쪽 상황도 아직 정리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협선이면 가능합니다. 장군

준사!
꼭 살아 돌아오거라


개정판 교감완역본 [난중일기]에서 노승석 역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충무공은 본래 어려서부터 유학(儒學)을 독실히 배웠기에 문재를 지닌 선비적인 성향이 강한 분이었다. 장인의 영향으로 무인의 길로 나아가 장수로서의 기상을 떨쳤지만, 그의 내면은 오히려 감성적이고도 도덕을 중시한 면이 강했다. 이 점에서 후인들은 충무공을 평할 때 항상 문무겸전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코 한 장수로만 봐서는 안되고, 그의 도덕에 기초한 인간적인 면모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라고요.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서 <노량-죽음의 바다>역시도 이런 이순신의 면모를 아주 적절하게 잘 담아냈다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3부작의 마지막 영화로서 정말 완성도가 높았고 가슴을 뜨겁게 달궈주니 그만큼 자꾸자꾸 보고 싶은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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