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이 아니었다면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여전히 많을 것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1987년의 일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검색만 하면 모든 진실이 다 나오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책도 있고 영상기록도 있고요. 진실을 알기까지 몇 초도 안 걸립니다. 그런데도 1987년의 역사를 모르는 우리들은 수두룩합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1987 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져서 우리는 2시간 남짓만 할애하면 1987년의 중요한 사건들과 진실을 모두 자세히 알게 됩니다. 공식적으로 집계된 통계만 보더라도 723만 명의 관객이 <1987>을 봤습니다.
물론 영화이기 때문에 허구적인 부분도 있지만 사실이 영화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영화라는 느낌보다는 이보다 더 생생할 수 없는 역사를 직접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훨씬 더 큽니다.
그만큼 #1987 영향은 대단했고 영화가 정말 열일했습니다.
2017년 12월 27일 개봉한 영화 #1987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고(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둘러싸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세력과 목숨을 걸고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당시 사건을 은폐하라는 상부 지시를 무시하고 법대로 부검을 강행한 최환 부장검사, 영등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전직 기자이자 민주화 운동가인 이부영이 옆방에 수감된 고문 경찰관들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뒤 친한 교도관을 통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전달하여 폭로하게 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에도 봤고
지난 2024년 6월 9일(일요일), 충남도서관에서 아이들과도 봤습니다. 가는 김에 아이들의 친구들도 데리고 갔습니다. 어려서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봐두면 다음에 역사를 배울 때 ‘그때 그 장면’이 하나라도 떠올려질 거라고 말해주고 일단 보자고 했습니다.
개봉당시 영화를 보는 내내 손에 주먹이 쥐어지고 부르르 떨리기도 했고 한숨이 쉬어지고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랬습니다.
아이들은 왜 그렇게 많이 우냐고 하고 같이 데려간 아이들도 우는 제가 낯설다는 듯이 힐끔힐끔 쳐다보았습니다. 그냥 드라마 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저도 학창 시절 교과서로만 국사를 배웠고,
역사를 바로 알려고 하기보다는 시험 문제를 한 개라도 더 맞히기 위한 수단으로써 국사를 공부(?)했었으니까요. 그 결과 사실을 직시(直視-사물의 진실을 바로 봄) 하지 못했고 공감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성인이 되었고 책을 가까이하면서 역사의 진실을 바르게 알기 전까지는 저도 아이들과 똑같은 상태였습니다.
진실 앞에서는 눈뜬장님,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그런 부끄러운 국민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세 아이들의 엄마가 되자 더는 부끄러운 어른으로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사를 공부했습니다.
독재정권 하에서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고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까지 얼마나 아픈 과정이 있었는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정말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누리고 사는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선량한 국민들의 목숨과 맞바꿔 얻은 '민주주의'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화 <1987>은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3학년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 군이 서울시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다가 사망하자, 사실을 감추려고 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이 이때 나온 말입니다.
1987년엔 제가 유치원생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위 사건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훗날 국사 교과서에서 처음 봤을 뿐!
그렇지만 희미하면서도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 장면과 말이 있어요.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화염병을 던지고 도로 곳곳에 불이 붙어있고 뿌연 연기, 무장한 전투 경찰들의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30년이 넘은 지금도 사진처럼 생생합니다. 그리고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당시 어른들이 했던 말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죽겄다고 공부시켜 놓았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허구한 날 데모질이나 하고 말이야.
썩을 놈들...
이런 말들이었어요. 그땐 제가 너무 어려서 데모하는 사람들이 못된 사람인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사실을 알고 보니 민주화 운동을 했던 대학생 언니, 오빠들과 선량한 대한민국의 국민들이었지 뭡니까.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진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정말 제대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중학교 다닐 때 80년대에 운동권에 있었던 국어선생님도 계셨는데요. 교장선생님께서 은근히 미워하고 싫어했던 눈초리가 생각납니다. 국어 수업 중에 운동권 노래, 일화를 틈틈이 들려주셨던 기억도 어렴풋이 떠오르고요. 중학생이었지만 당시에도 잘 몰랐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조금만 더 역사에 관심을 갖고 일찍 깨우쳤다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1987년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래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속속들이 자세히 알게 되기까지 저는 너무 늦었지만 지금 이 땅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 아이들은 꼭 일찍 알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해마다 6월 달력을 보면 6월 10일에 뭐라고 쓰여 있나요?
6·10 민주항쟁 기념일
이라고 써 있습니다.
6·10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정부 시위입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4·13 호헌 조치 그리고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고 이후 1987년 12월 16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4·13 호헌 조치는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취한 조치를 말합니다. 말 그대로 '현행 헌법을 유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호헌(護憲)'이란 '현재의 헌(憲)법을 보호(護)하여 지킨다'는 뜻으로, '호헌조치'라는 것은 현행 헌법을 바꾸지 않고 계속 유지하겠다는 뜻입니다. 당시 헌법이 군부독재정권이었고 전두환 정권에게만 유리한 그런 법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분노할 수밖에요.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고,
사회 운동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가져온 6월 민주항쟁
그 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었기에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누구나 이 사건을 정확하고 자세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박종철 학생은 누구이고 뭘 했기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6월 민주 항쟁의 계기가 되었나? 그리고 왜 수많은 국민들은 너도나도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를 외치며 전국적으로 들고일어났는지도요.
그런데 영화는 박종철 군의 사망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 전의 이야기는 모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잠깐 짚고 넘어가 보겠습니다.
독재정권 속에 있었던 1987년은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습니다. 야당 정치인과 민주화 운동 지도자들은 헌법을 새롭게 고치고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하라고 요구하고 있었지요.
왜 그랬을까요?
전두환과 신군부(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를 무너뜨리고 육군 소장이었던 전두환이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총과 탱크를 동원해 군사 반란을 일으켜 새롭게 군권을 장악한 세력)는 5·18 민주화 운동(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에서 죄 없고 힘없는 수많은 시민들이 독재정권에 맞서 군인들과 싸우다 주검이 되어 끝난 민주화 운동)으로 흘린 시민들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독재정권을 이어가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은 감옥에 가두어 활동을 막고, 언론인은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쫓아내 입을 막으려고 했지요. 국민과 학생이 시위를 벌이면 곧바로 잡아가서 간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웠습니다. 이런 식으로 전두환 정권은 사회 전체를 공포 분위기로 몰고 갔습니다. 사회를 어지럽히는 깡패와 폭력배를 교육한다며 '삼청교육대'란 것을 만들기도 했는데요. 경찰서마다 삼청교육대에 보낼 사람의 수를 꼭 채워야 했기 때문에 깡패나 폭력배뿐만 아니라 경찰에 밉보이거나 외모가 불량하다거나 또는 술을 많이 먹었다는 이유 등을 붙여 멀쩡한 국민들을 그냥 잡아갔다고 합니다. 전두환 정권은 정말 무섭고 파렴치한 독재정권입니다. 삼청교육대가 내세운 규칙 제1조가 '도망치는 자는 총으로 쏴 죽인다.'였다고 합니다. 지금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전두환 정권은 권력을 이용해 마음대로 휘두르고 저질렀습니다.
1980년대 초, 중후반까지 대한민국의 상황이 이랬기에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민주주의를 꿈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의 바람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4월 13일, 헌법을 고칠 수 없고 대통령 직선제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독재정권을 계속 이어가려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고 말지요. 그러니 국민들의 분노도 점점 더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 군이 남영동에서 공안 경찰에게 고문을 받다가 사망한 겁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은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1985년 10월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으로 '민추위' 지도위원이었던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를 추궁하기 위해 1987년 1월 14일 새벽, 하숙집에서 박종철 군을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로 끌고 갔습니다. 사건 당시 박종철 군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이었고 1986년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를 한 이유로 구속되어 징역을 선고받은 바 있으며, 출소 이후에도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수배받고 있었던 사람은 '박종운'이지 '박종철'이 아니지 않습니까?
수사관들은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며 협박하고 닦달했습니다. 이에 박종철 군이 순순히 대답하지 않자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겨 조사실 안에 있는 욕조로 끌고 가 물고문을 반복했습니다. 10시간이 넘는 잔혹한 폭행, 전기고문 등과 함께. 고문에 가담한 자들은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장, 이정호 경장 등 5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수배 중인 박종운을 체포해 일계급 특진을 하겠다는 일념에 불타있었습니다. 박종운은 현상금까지 붙어있었으니까요. 박종철 군이 계속해서 모른다고 하자 결박당한 두 다리를 들어 올려 또다시 물고문을 했고 오전 11시 20분경, 고문 도중 욕조의 턱에 목 부분이 눌리면서 결국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인해 의식을 잃었습니다. 11시 45분경, 경찰 측이 부랴부랴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의 의사 오연상 박사를 불러 심폐소생술을 시키고 심장에 강심제도 주사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수사관들은 박종철을 대공분실 부근의 용산 중앙대학교병원으로 이송하려고 시도했지만 오연상은 긴급히 병원으로 연락하여 시체가 병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는 “병원 응급실에 들어갔을 때까지는 살아 있었다”라고 우겨 의료사고로 둔갑시키려는 것을 막은 것입니다.
경찰은 이후 오연상에게 수사관 3명을 붙여 감시하였고 그다음 날(15일)에도 감시했으나 화장실에서 잠입하고 있었던 동아일보 기자 윤상삼을 불현듯 만나서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었음을 알렸습니다. 소리소문 없이 은폐될 수도 있었던 박종철 군의 죽음이 오연상 의사의 양심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1987년 1월 14일 저녁 7시 40분쯤, 최환 부장검사가 홀로 근무하고 있는 부장검사실에 대공수사처 박처원 처장이 보낸 대공 경찰관 2명이 찾아옵니다. 경찰 조사 중이던 대학생이 사망했다는 변사 보고서(A4 용지로 2쪽짜리)를 내밀면서 원인은 심장마비 급사이고 유족도 화장에 동의했으니 시신을 바로 인도하여 자정을 넘기기 전에 화장할 수 있게 지휘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원래 수사 중 사람이 죽으면 일반적으로 관할 경찰서가 '변사사건'으로 분류하고 사망 경위에 대한 진술 및 현장에 대한 확인을 거쳐 관할 검찰청의 형사부 검사(야간에는 당직 검사)의 지휘를 받아 타살 혐의가 있으면 부검이나 검시를 거쳐 시체를 통한 증거를 확보한 다음에 장례를 치르도록 한다고 합니다. 만약 타살 혐의가 없으면 검사가 검시를 하거나 또는 검시 없이 바로 장례를 치르도록 유족에게 시체를 건네주게 된다고 해요.
그런데 이때 경찰의 말대로 심장마비 급사로 보고 "시체를 유족에게 인도하라"라고 지휘했다면 경찰은 속전속결로 화장시켜서 아무런 증거를 남기지 않았겠죠. 사망사건에서 시체에 대한 부검이 없으면 아무런 물증이 없거든요.
오연상 박사 다음으로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 또 등장합니다.
(실제로 이 보고서에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어서 직감적으로 최환 부장검사는 고문으로 인한 사망이겠구나 싶었답니다.)
그래서 최 부장검사는 "세상의 어느 부모가 서울로 유학 보낸 자녀가 사망했다는데 그 자녀의 얼굴조차 보지 않고 바로 화장하겠다고 나서겠습니까? 화장이든 매장이든 그전에 부모가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세요."라고 반박하지요.
그러자 (경찰 뜻대로) 화장을 허락하라고 청와대, 안기부, 검찰 내부 등 여러 곳에서 압력이 빗발쳤는데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경찰의 요청을 끝내 거부하죠! 그리고는 경찰에 '시신보존명령서'를 내려 ("시신에 손대는 순간 싹 다 공무집행방해 혐의를 걸어버리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시신이 훼손되지 못하게 한 후, 용산경찰서장 명의로 정식 변사사건( "변사"란 자연사 이외의 특정한 이유로 그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죽음을 말하고 "변사사건"이란 변사자 또는 변사로 의심되는 시체가 발견된 사건을 말한다.) 발생 보고 및 지휘건의를 하도록 지휘합니다.
그다음 날인 1월 15일, 검찰청 휘하에 배속된 형사부 소속 안상수 검사를 부검 장소인 한양대학교 병원으로 보내어 사망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부검을 지휘합니다. (사체부검도 경찰들 말대로 경찰병원에서 했으면 큰일이었죠. 이때도 최환 부장검사는 경찰에서 수사 중 변사한 사체를 경찰병원에서 부검하면 그 결과를 언론과 국민들이 믿겠느냐며 경찰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이로써 박종철 열사의 시신에 대한 부검이 1987년 1월 15일 밤 9시경부터 밤 10시 25분까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장 황적준 박사의 집도에 따라 검사 안상수, 박동호 한양대병원 의사의 배석하에 부검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가족으로는 박종철 군의 삼촌 박월길 씨가 입회했고요.
부검 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 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 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고 합니다.
같은 날 1월 15일 오전 10시가 조금 못됐을 시간에는...
중앙일보 사회부의 신성호 기자가 소위 오전체크라고 하는 체크를 위해 평소처럼 검찰 간부들의 방을 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간부의 방에 들어갔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경찰들 큰일 났어."라고 말하는 걸 들었고 사건의 냄새를 직감한 신 기자는 이미 알고 있다는 투로 맞장구를 쳐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단편적으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니까 "서울대학교 학생이 남영동에서 조사를 받다가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탐문 끝에 들은 것은 '박'자와 '종'자 두자뿐 끝까지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간신히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이라는 사실을 알아내 서울대학교 학적부를 뒤진 끝에 박종철이라는 이름을 찾아냈습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21살의 대학생 박종철. 부산에 있는 가족들과도 통화를 해서 가족관계까지 확인함으로써 최종 확인된 게 낮 12시쯤이었다고 해요. 1월 15일 석간(매일 저녁때에 발행되는 신문) 인쇄가 돌아가고 있었는데 인쇄소 윤전기를 멈추게 한 뒤 신성호 기자가 쓴 기사를 사회면에 2단 기사로 집어넣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월 15일 오후 3시 30분 중앙일보 사회면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가 석간에 단신으로 실려 국내 언론과 외국 언론에서도 인용되었고, KBS와 MBC 저녁 뉴스에서도 단신으로 내보냈습니다.
어제 낮 12시쯤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21살(만 나이) 박종철 군이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다가 숨졌습니다. 숨진 박 군은 서울대 민민투 책임자로서 수배 중인 사회복지학과 박종운 군을 숨겨준 혐의로 어제 오전 경찰에 연행됐었습니다.
-1987년 1월 15일에 방송된 MBC 단신보도-
이후 기자들이 사실 확인을 위해 벌떼같이 달려들자 이에 경찰은 긴급 대책회의를 연 뒤, 같은 날인 1월 15일 오후 6시쯤 치안본부장 강민창과 치안감 박처원은 대국민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조사관이)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습니다.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장으로서 남영동 대공분실의 총책임자인 박처원.
그는 이렇게 희대의 망언을 남겼습니다.
(1987년 1월 15일 기자회견에서)
박종철의 사망 원인에 대해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라는 거짓 시인을 하려니 말이 쉽게 나올 리가 없습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우물쭈물 머뭇거리자 대공수사처 박처원 처장이 발표합니다.(실제로도 박처원 처장이 한 말입니다.)
눈 가리고 아웅도 유분수지
이런 망신이…
세상에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어디 있다고 수많은 취재진들 앞에서 했느냐 말입니다. 그러니 실제로 촬영을 했을 때 김윤석 배우는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막혔을까요? 아무리 배우라지만 입을 떼기가 참 어려웠을 겁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부장 최환은 온갖 압력을 물리치고 천신만고 끝에 부검을 관철시켜 다른 의문사들과 달리 명백한 '고문치사'로 사망원인을 규명했습니다.
그리고 부검을 집도한 황적준 박사와 한양대학교 박동호 교수도
박종철 군의 사망원인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입니다.
라고 부검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발표해 박종철은 '쇼크사'한 것이 아니라 물고문으로 죽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습니다.
따라서 박종철 열사는 치안본부가 당초 언론에 밝혔던 것처럼 '탁 치니 억' 하고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 아니라 대공 수사당국의 물고문 도중 질식사한 것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밝혀졌습니다.
경찰 측에서 부검 감정서에 "사인을 심장쇼크사로 하라"는 외압에 시달렸지만 황적준 부검의는 불의에 타협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소신껏 진실을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오연상의 사체 검안(의사가 사체에 대해서 사망 원인, 시간, 장소 따위를 의학적으로 확인하는 일)을 확증하게 됐지요.
(1988년 1월 14일에 황적준 박사는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는데요, 부검 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받은 내용들을 적은 것이었습니다. "부검 과정에서 경부압박 질식사로 판명되어 보고했으나, 강 치안본부장으로부터 '부검소견서를 변경하고 외상 부분을 빼라'는 외압이 있었다"라고 증언했고 당시 수사 검사였던 안상수 역시 "박종철 사건을 검찰에서 직접 수사하려 했으나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초동수사를 경찰에 맡기기로 하면서 사건 조작의 여지를 주었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면서 또 반전되었다. 이 둘의 증언으로 검찰이 다시 수사에 나서면서 1월 14일에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을 자진 출석케 한 뒤 다음날에 구속시켰습니다. 또한 강민창이 국과수 소장에게 100만 원을 주며 회유하려고 한 사실이 드러났고 황적준은 조직에 해를 끼쳤다며 국과수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의 일기장은 황적준 박사의 양심과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검색하면 나오니 궁금하신 분들은 찾아보십시오.)
동아일보는 1월 16일부터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오연상과 조카 부검에 입회했던 박종철의 삼촌, 박월길 등의 증언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단순 사망이 아님을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7일 자 보도에서 오연상 의사의 증언에 의하면 "사건 현장 바닥에는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라고 했고 복부팽만이 심했으며 폐에서는 수포음이 들렸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수포음이란 물고문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 하나 이 보도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직감적으로 물고문이 있었을 거라고 믿게 되었죠! 그러자 경찰들은 진실을 숨기느라 바빴는데요. 조직적으로 움직여 사실을 감춘다고한들 감춰질까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고 살벌한 분위기의 군사독재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양심 있는 발언들 덕분에 감사하게도 억울한 죽음이 은폐되지 않고 역사의 분수령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진실은 반드시 드러납니다. 독재정권 하에서 아무리 권력을 휘두르고 무력을 써서 감추려고 해도 굽히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진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면 위로 올라오려는 에너지가 넘쳐납니다.
번외로 박종철 군의 사망을 최초로 목격한 오연상 원장은 현재 서울시 동작구에서 <오연상내과>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 규명에 기여한 공로로 1987년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에서 제1회 인권상을 수상했습니다.
우연히 보게 된 인권상 수상 당시에 했던 소감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워낙 독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어서 진실을 말하는데 부담이 있었지만, 어영부영 넘어가는 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상황을 확실하게 밝혀서 진술 번복이나 사건 은폐가 불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박종철 군 사건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당시 공포심에 말을 못 했거나 쇼크사라고 인정했다면 평생 마음에 짐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이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죠! 세상에는 인간의 탈을 쓰고 인간이 아닌 행동을 하는 사람과 인간다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래서 선과 악이 늘 공존하나 봐요.
아무런 잘못이 없는 대학생을 연행해서 고문으로 죽게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진실을 숨기고 사건을 조작하려 했다는 것이 밝혀지자 운동권에 반감을 갖고 있었던 시민들도 분노에 들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결국 기자회견 4일 만인 1월 19일, 강 치안본부장은 다시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기존의 입장을 뒤집고 "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는 심문에 답하지 않자 머리를 한 차례 잠시 집어넣었다 내놓았으며, 계속 진술을 거부하자 다시 집어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사했다"라고 "가혹행위"로 인한 사망을 시인하였습니다. 이후 조한경과 강진규 등 고문 경찰관 2명을 사건 주도자로 지목해 구속하면서 사건을 축소하려고 했습니다. 게다가 부검을 마친 박종철 군의 시신을 가족 허락도 없이 벽제화장터에서 화장하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했습니다.
사건 주도자로 구속된 경찰 두 명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됐습니다.
당시 안유 구치소 보안계장은 이들을 접하는 과정에서 그들 외에도 추가로 경찰관 3명이 더 고문에 관여한 사실을 알게 되고 경찰은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다는 정황을 포착하게 됩니다. 안유 계장은 마침 수감 중이었던 당시 민주화운동가이자 동아일보 해직 기자였던 이부영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였고, 이부영은 휴지에 추가 관여 은폐 사실을 적은 뒤 친분이 있었던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외부에 전달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부영의 증언에 따르면 옆방에서 계속 우는 소리가 들려서 친분이 있는 교도관에게 물어보니 '사실은 고문경찰관이 더 있는데 우리만 잡혀와 모두 뒤집어쓰게 됐다.'는 진실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안유 보안계장과 한재동 교도관들의 신원은 혹시 모를 불이익 때문에 비밀로 부쳐지다가 모두 정년퇴직한 2010년에 같은 영등포 교도소에서 근무했던 직원이 <가시 울타리의 증언>이라는 책을 쓰면서 밝혀졌다고 합니다. 이부영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 사람들을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숨은 영웅 안유 계장과 한재동 교도관은 2012년 박종철 25주기 추모식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1987년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위한 7주기 추도미사가 있었는데 이때 김승훈 마티아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만천하에 공표하였습니다. 대공경찰의 대부라는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축소하였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도 새롭게 밝혀냈습니다. 폭로 다음 날 통일민주당에서는 당 차원에서 진상조사를 벌이겠다고 밝혔고 박종철 군의 아버지 박정기 씨는 명확한 진상규명과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대행해 달라는 진정서를 대한변호사협회 측에 전달하였습니다.
즉, 영등포교도소 안유 계장 → 해직기자 이부영 → 한재동 교도관 → 전병용 퇴직 교도관 → 재야 민주화운동가 김정남 → 함세웅 신부 순으로 문건이 만들어져 이동하고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군부독재정권하에서 권력을 남용하고 무력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만든 것도 모자라 독재 헌법을 유지하려고 한 전두환 정권.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함부로 여기는 비도덕적인 정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은 미약할 수 있지만 100만 시민이 함께하면 두려울 게 없습니다.
1987년 6월 9일!
다음 날인 6월 10일에 있을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했던 이한열 열사는 결의대회를 마친 뒤 10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시위 진압을 위해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쐈고, 이 과정에서 이한열 열사는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함께 시위에 참여했던 학우의 부축을 받아 시위 현장을 빠져나왔는데, 이 장면을 로이터 통신 기자가 촬영해 보도하면서 해당 사건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지요.
안 그래도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는데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았다는 소식에 시민들의 들끓는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약 20일 동안 학생과 시민 등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6월 민주항쟁입니다.
이 시위가 지속적으로 이어지자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정권은 김종호 내무부 장관과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해임시켰고 박처원 치안감을 비롯 대공 간부 3명을 사건 은폐, 축소 조작으로 구속시켰습니다. 또한 고문을 근절시키겠다는 대책도 마련하기는 했지만 이미 폭발한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습니다. 전두환의 오른팔인 장세동 안기부장과 노신영 국무총리를 해임시킨 뒤, 국민들 앞에서 6·29선언을 발표하게 되지요. 결국 6월 민주항쟁은 국민들의 승리로 끝났고 전두환 정권은 무너졌습니다.
(한편,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쓰러진 이한열 열사는 27일간 사경을 헤매다 안타깝게도 결국 1987년 7월 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민주화였는데...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드디어 꽃을 피우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꼭 이렇게 희생이 따르네요. 지난 일이어도 참 비통합니다.
영화는 6·10 민주항쟁이 발발하면서 끝이 납니다. 민주주의의 시작을 알려주는 것이라 기뻐해야 마땅하지만 자리를 뜨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영화의 여운이 계속 남아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복잡한 감정들이 자꾸 밀려와서 정신이 몽롱하기까지 했습니다.
기다렸던 1987년의 이야기가 2017년 12월 끝자락에 영화로 나오기까지 30년이나 걸렸습니다.
이 영화를 만들어주신 장준환 감독님 이하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진실을 제대로 알게 큰 도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저도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고싶습니다.
2001년, 박종철이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지정됐습니다.
그리고..
2018년 3월 26일,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에 실리는 것이 결정됐답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불법적으로 경찰에 끌려갔던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미 사실이 분명히 밝혀졌는데, 명예 회복이 되기까지도 참 오래 걸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진짜 민주주의 맞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