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속 패션]수트를 입은 로메인 브룩스

'예술가의 옷'

by 소재수집가
330px-Gustave_Caillebotte_-_Jeune_homme_%C3%A0_sa_fen%C3%AAtre_%28B_32%29.jpg 창가에 있는 젊은 남자(Jeune homme à sa fenêtre)


카유보트의 그림에는 창문 난간에 기대 바깥 풍경을 내려다보는 한 남성이 등장한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화면 왼쪽 아래쪽에 한 여성의 모습이 포착된다.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이 장면은 남성을 '보는 주체'로, 여성을 '응시의 대상'으로 배치해 온 서구 미술사의 오랜 관습이 묻어 있다. 오랫동안 회화 속에서 여성은 남성의 시선 아래 머무는 존재로 재현되어 왔다. 마네의 '올랭피아'나 앵그르의 '터키 목욕탕'은 이러한 전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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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마네의 올랭피아 / (우) 앵그르의 터키 목욕탕


그러나 이러한 시선의 구조는 20세기에 접어들며 서서히 균열을 맞이한다. 산업혁명의 도래 이후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점자 확장되면서 회화 속 여성은 더 이상 일방적으로 응시당하는 대상에만 머무르지 않게 되었다. 이 변화는 낯설고 조심스럽지만, 기존 질서에 미묘하게 맞서는 도발적인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 중심에는 수트를 입은 여성 예술가들이 있었다.


오늘날 여성들이 수트를 입는 것은 매우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여성이 수트를 입는 행위는 남성 중심 권력 구조에 맞서는 명백한 도전이었다. 그 당시 수트는 남성성, 백인 엘리트 중심 질서, 서구 제국주의적 권위를 상징하는 복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여성 예술가들이 수트를 착용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향하는 시선의 방향을 다시 쓰고자 했던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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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인 브룩스의 자화상


대표적으로 여성 예술가 로메인 브룩스(Romaine Brooks)는 자화상 안에서 수트를 입고 등장한다. 그녀는 댄디(dandy)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검은색 코트, 화이트 셔츠, 실크 톱 해트(top hat)를 착용한 채 전통적인 여성성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모습을 하고 있다. 자화상 안에서 중성적인 그녀의 모습은 오랫동안 화폭 안에서 시선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의 위치에서 벗어나 시선의 주체로 거듭나려 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남성의 옷을 착용한 것을 넘어 젠더 권력 구조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태도다.


브룩스가 입은 수트는 동성애자였던 그녀의 성적 정체성과도 연결된다. 밝고 장식적이고 화려한 드레스가 '여성의 옷'이라고 여겨졌던 시기, 브룩스는 사회가 강요한 여성성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창조자로서 위치해 온 남성 예술가의 자리를 점유했다.


Mrs Emmeline Pankhurst, Leader of the Women's Suffragette movement, is arrested outside Buckingham Palace while trying to present a petition to King George V in May 1914.jpg


이 시기는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서프러제트(suffragette) 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던 때와 맞물려 있다. 1900년대 초부터 1914년까지가 그 전성기였으며, 시기적으로 보면 브룩스의 활동은 이 흐름의 정점 이후에 위치한다. 그러나 이는 여성의 정치적 투쟁이 사라진 이후라기보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그 투쟁의 무대가 거리에서 전장과 후방으로 이동한 시기였다.


전쟁은 여성들의 참정권 요구를 일시적으로 중단시켰지만, 동시에 여성들은 전례 없는 노동과 사회적 역할의 현장으로 밀어 넣었다. 투쟁은 멈춘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브룩스의 수트 차림은 집단적 정치 운동과는 다른 차원의 응답으로 읽힌다. 그것은 구호나 시위 대신, 몸과 이미지, 그리고 옷을 통해 수행된 개인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정치적 태도였다.


하지만, 브룩스의 이러한 실천 역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다시 전쟁이 시작되면서 유럽의 실험적 예술, 여성 인권 운동, 동성애 문화는 또 한 번 주변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성 예술가들의 ‘남성복 입기’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전후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기존 젠더 규범을 흔드는 중요한 시각적 전략으로 다시 등장했고, 20세기 후반 여성 퍼포먼스 예술가들로 이어지며 또 다른 계보를 형성했다.


오늘날 아무렇지 않게, 그저 평범한 옷처럼 여겨지는 수트는 사실 이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복합적인 상징을 품고 있다. 삶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정체성을 끊임없이 사유하는 예술가라면 성별과 무관하게 수트를 입는 순간, 그 옷에 축적된 암호화된 의미와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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