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천국과 지옥은 그저 판타지?
인간은 그 긴 역사에서 늘 신의 존재를 알고 싶어 했고 만나고 싶어 했다. 오래전 누군가는 신을 만났다고 하고 신이 우리 가운데 온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이제 누구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실체로 신을 만난 적 없다. 이게 다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 때문이다.
테드 창, 지옥은 신의 부재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조차도 한 해의 끝과 시작에서 이런 인사를 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 말에 담긴 의도나 정서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저 돈 많이 벌고 사람들 사이에서 권력을 가지라는 의미로 말한다고 가정해도 이건 알 수 없는 어떤 신적 존재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렇듯 인간은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의 神을 찾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특정 이름으로 신을 부른다. 하나님, 하느님, 알라, 야훼 이렇게 말이다. 신기하게도 유일신을 믿는 3개의 종교는 그 기원이 동일하다. 조상신을 받들거나 자연 자체를 신으로 섬기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예는 유교와 일본의 종교관이고 후자는 고대 그리스와 대부분의 소규모 종교의 신관(神觀)이다. 어떤 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대부분의 인간들 심지어 특정 종교에 심취한 이들조차 신을 자기를 위한 도구 중 하나로 여기는 문제를 앉고 있다. 신이 전지전능(全知全能) 한 존재로 세상의 질서와 나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좌지우지(左之右之) 할 수 있는 존재라면서 불경스럽기 짝이 없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과 전혀 관계없이 살아간다는 사람도 사실 신이 나 종교의 영향을 받는다. 행운에 대한 바램조차도 철저히 배제하는 자신교(自身敎) 신자들에게도 종교는 윤리적 각성이라는 측면에서 영향을 끼친다. 사실상 神과 격리된 인간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유는 신이 내 뜻과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태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의 윤리기준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설화나 전설로도 표현된다. '天國과 地獄'은 그 중 가장 극적인 설정이다. 대부분의 권선징악(勸善懲惡)이 천국과 지옥이라는 양극단을 잘 이용한다.
악인(惡人)은 죽어 지옥에 가서 영원한 벌을 받고 선인(善人)은 천국에 가 영원한 희락을 누린다는 것이다. 얼마나 간단하고 극명(克明) 한가?
현재 국내에서 인기리에 상영 중인 영화 ‘신과 함께’는 저승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저승을 너무나 섬세하게 그렸다. 죄의 경중을 판단하는 시스템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는 정교(?) 하다. 물론 ‘천만 관객 동원’이란 목표 아래 눈물바다를 만들어버려 그렇게 잘 만든 배경이 무색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저승세계를 묘사할 때는 우리가 이해 가능한 것들로 표현해야 한다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묘한 분위기에 특수효과를 쓰고 컴퓨터 그래픽을 처발라도 우리가 아는 공간과 시간 개념 안에 머문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과 지옥의 개념은 맞는 것인가? 아니 우리의 신관은 건전한가? 앞서 우리는 신조차도 우리의 기준에 맞추고 심지어 내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만능 도구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한다는 성경에서조차 천국의 묘사는 판타지에 가깝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73003
신과함께-죄와 벌
감독 김용화
출연 하정우, 차태현, 주지훈, 김향기, 김동욱, 마동석
개봉 2017 한국
성경에서 천국에 대한 묘사가 잘 되어있는 것을 들자면 아마도 요한 사도가 쓴 계시록 일 것이다. 그가 묘사한 내용을 요약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유리바다'다. 천국은 지구의 하늘 위 하늘 또 그 하늘의 위에 존재하며 유리바다 위에 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유리바다에서 말하는 유리가 우리가 아는 규소 재질의 투명하고 딱딱한 재질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다. 요한은 그저 자신이 환상 중에 본 것을 자기가 아는 지식 안에서 묘사한 것뿐이다. 그런데 이걸 교회는 천국에는 유리바다 위에 금은보석으로 만들어진 건물이 세워져 있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지옥에 대한 묘사는 더 가관이다. 마치 현실세계의 고문 장면으로 설명한다. 죄수는 망자(亡者)로 간수는 악마로 바꿔서 말이다. 이생과 완전히 분리됐다는 천국과 지옥의 모습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 비슷한 원리로 돌아가는 것은 왠지 이상하지 않은가?
최근 개신교 내부에서는 야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기존과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 하나님이 내가 세상 사는데 필요한 것들 특히 돈이나 권력을 주는 하찮은 존재가 아닌 신 자체로 보자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 개신교나 불교 신자들이 그렇게 달라는 '복'도 다르게 본다. 그것은 '신과 나의 친밀한 관계'를 말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는 목적은 ‘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고 기도는 ‘신과 나누는 대화’라는 주장이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해석도 전통적이지 않다.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기준도 신과 나의 친밀감에 두고 있다. 내 마음에 신이 없으면 지옥이고 내 마음에 신과 함께하는 平安이 가득 차면 천국과 비슷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단편적인 내용들이라 이것으로 종교 전체의 교리를 대체할 수는 없지만 교회가 악덕기업보다 더 하다는 소리를 듣는 마당에 이 새로운 변증은 의미 있음은 물론이고 절실하기까지 하다.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56057842
당신 인생의 이야기
저자 테드 창
출판 엘리
발매 2016.10.19
지금부터는 내 해석이다. 나는 천국과 지옥을 이 세상으로 끌어와 본다. 이건 내가 잘나서도 내가 이상한 교리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상당수 개혁주의 목사나 종교학 교수들이 이런 생각을 한다. 앞서 지옥을 신의 부재로 상정했는데 신이 무시되는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자. 현대인의 혼란은 ‘신 아닌 신’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정의한다. 개신교에서 맘몬(Mammon)이라 부르는 신-돈, 신 위에 올라선 세상의 권력 또 어떤 신보다 강력한 자신(自信) 말이다. 또 다수의 불교 지도자들은 현재 불교계의 문제를 돈과 권력으로 상정된 ‘福’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크니 전지전능하다는 신이 하찮게 보이는 것이다. 원하는 것은 돈인데 신은 그걸 주지 않으니 말이다. 이렇게 신의 부재(不在)가 시작된다. 행복의 부재다. 요즘 사람들은 ‘삶이 지옥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죽음으로 이 지옥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은 지도 모른다.
최근 나는 과학자 소설가 테드 창의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었다. 이 책에는 지난해 국내에 ‘콘택트’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영화 ‘Arrival’의 원작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가 수록돼있다. 사실 나는 그중편 소설을 읽고 싶어 이 책을 들었는데 다른 단편 소설들도 수준이 높고 재미있다. 예를 들면 우울증으로 자살을 기도한 어떤 천재 수학자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에는 1과 2가 같은 수임을 증명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최근 나는 대화에서 이 증명을 인용하곤 한다. 이 소설은 기존 수학 이론이 허상(虛像) 위에 세워진 것을 발견한 한 인간의 끝 간 데 없는 공포를 다루고 있다. 바벨론 탑을 안에서 일어난 부조리를 담은 소설은 또 어떤가?
이 책에는 '지옥은 신의 부재'라는 제목의 단편이 포함돼있다. 사건의 발단은 수시로 일어나는 천사(天使)의 강림(降臨)이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통에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다. 반면 아무런 이유 없이 병이 치유되거나 장애가 없어진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 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누군가는 신앙이 생기고 반대로 신을 저주하기도 한다. 물론 그 난리 통에도 여전히 무신론으로 무덤덤한 이도 있다.
주인공은 천사 강림으로 아내를 잃고 지옥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가 모임에 나가는 이유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다. 그의 아내가 즉사하면서 승천하는 걸 봤다는 증언 때문이다. 그가 천국에 가고자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는 신과 친해 보려고 한다.
결국 주인공 닐은 천사를 추적하다 교통사고로 죽는다. 그는 지금 지옥에 있다. 지옥 사람들은 이승에서 살던 것처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산다. 특별한 고통도 없고 행복도 없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하지만 닐은 고통스럽다. 신에 대한 그리움은 ‘사랑이 떠난 후의 슬픔과 절망’ 같다. 더욱 아찔한 것은 그것의 영원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