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권력에 전염된 도시인에게 안식이란...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원인도 모르는 병에 걸려서 눈이 멀어버린다. 보통의 실명이라면 시야가 사라지면서 어둠이 찾아오지만 이 병은 어느 여름날 낮잠에서 깨려는 순간처럼 온통 밝은 빛에 감싸인다.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 중이던 남자는 갑자기 신호등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결국 다른 이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온다. 눈에 병이 생긴 것이라 생각한 이 남자와 이 남자의 아내는 안과를 찾아가 진료를 받는데 이날 이 안과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다음 날 집단적으로 실명을 하게 된다. 그들이 실명을 한 후에 '이 백색의 질병'이 전염이 된다고 판단한 국가는 최초로 전염(?)된 이들을 전염병에 대비해 만들었다가 방치해 된 격리시설에 수용한다. 그런데 최초로 격리된 이들 사이에 앞을 볼 수 있는 이가 하나 있다. 바로 안과의사의 아내다. 그녀가 감염되었다고 하면서 이 시설에 스스로 수용된 이유는 단지 실명한 자신의 남편을 돕기 위해서다. 앞을 보는 그녀는 앞으로 일어날 지옥 같은 상황을 바라보고 정확하게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가 아직 회사라는 곳에 다니던 시절, 나는 서평이란걸 썼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한 달에 2~3권의 책을 읽었기 때문이었고 마침 모 출판사에서 인문사회 분야 책이 출간되면 바로바로 보내주기로 해, 그걸 읽고 글을 쓰다 보니 2년 정도 그 출판사의 인문사회 분야책 대부분에 대해 글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 관련 칼럼을 쓰기 시작하면서 책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차와 친해지면 책과 멀어지는 공식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가 보다. 오래 전에 차로 출퇴근을 하다가 BMW(Bus Metro Walking)을 이용하면서 하루에 세 시간의 여유가 주어졌고 그 시간에 참 많은 책을 읽고 성경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차와 가까워지면서 인쇄된 활자(活字)보다는 디스플레이에 표기된 휘발성 (Volatile, 揮發性) 문자에 더 익숙해져서 생각도 휘발성이 되어간다.
각설(却說) 하고 다시 오늘의 주제인 '눈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원인도 모르는 병에 걸려서 눈이 멀어버린다. 보통의 실명이라면 시야가 사라지면서 어둠이 찾아오지만 이 병은 어느 여름날 낮잠에서 깨려는 순간처럼 온통 밝은 빛에 감싸인다.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 중이던 남자는 갑자기 신호등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결국 다른 이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온다. 눈에 병이 생긴 것이라 생각한 이 남자와 이 남자의 아내는 안과를 찾아가 진료를 받는데 이날 이 안과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다음 날 집단적으로 실명을 하게 된다. 그들이 실명을 한 후에 '이 백색의 질병'이 전염이 된다고 판단한 국가는 최초로 전염(?)된 이들을 전염병에 대비해 만들었다가 방치해 된 격리시설에 수용한다. 그런데 최초로 격리된 이들 사이에 앞을 볼 수 있는 이가 하나 있다. 바로 안과의사의 아내다. 그녀가 감염되었다고 하면서 이 시설에 스스로 수용된 이유는 단지 실명한 자신의 남편을 돕기 위해서다. 앞을 보는 그녀는 앞으로 일어날 지옥 같은 상황을 바라보고 정확하게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주제 사라마구는 잘 알려진 대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들 대부분은 이베리아(Iberia) 반도라는 지역적 배경을 가지고 있고 좀 더 구체적인 특정 작품에서는 그의 조국인 포르투갈 정부에 대한 강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포르투갈 정부가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이런 이상한 상황은 한국에서도 일어난 적이 있다.) 또 현재 그가 조국을 떠나 에스파냐 령(嶺)에서 생활하는 것도 같은 매락이다.
본 작품 '눈먼 자들의 도시'만은 어떤 도시라는 모호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른 작품에서 읽히는 그의 반항정신이 표면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이 작품은 좀 더 심각한 인간세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로 돈과 명예 즉 탐욕에 눈이 먼 인류 전체에 대한 비난을 담고 있다.
탐욕이라는 전염병에 걸린 이들에게 어느 날 찾아온 실명, 그 실명은 그동안 누려온 모든 것을 한순간에 앗아가 버린다. 단순한 이동 수단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자동차는 더 이상 내가 운전하고 다닐 수 없다. 아니 내가 눈이 멀어버리는 순간 그 차를 누군가에게 빼앗길 수도 있고 그렇다고 해도 이제는 더 이상 그 차에 대한 미련이 의미가 없다. 너무 익숙해서 이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이 느껴지던 나의 커다란 집은 눈이 멀어버린 순간 너무가 크고 복잡하여 위험하기까지 한 미로(迷路)일 뿐이다. 또 그동안 누리던 사회적 지위, 업적 그리고 수많은 그 무엇들이 실명과 함께 의미가 없어진다.
국가라고 칭해지는 집단적 권위는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늘 그렇듯이 개개인들 보다 더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 패닉(Elite Panic)이다. 그들이 개인보다 더 위기 앞에 호들갑스러운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어렵게 얹은 것은 빼앗기기까지 스스로 내려 놓기 쉽지 않은 법, 정점의 권력이나 주체하기 어려운 부를 가진 이들은 가진 것을 내려놓고 자연인[natural person, 自然人]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대한 깊은 공포와 만나게 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보건당국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는 위기 상황에서 최선(最善)이 아닌 차악(次惡)의 방법인 강제수용(強制收用)을 선택한다. 이미 공통의 선을 추구한다는 전제하에 만들어 놓은 법에 따라 적절해 보이는 선택이지만 이것은 타조가 도망가다 지쳐서 자포자기(自暴自棄)로 얼굴만 땅에 쳐 받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즉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이미 실명한 이들과 접촉한 것으로 추정되는 보균자(?)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서 그들의 시선에서 사라지게 함으로서 그들 자신이 편하지는 것이다.
안과에서 만났던 최초의 실명자들은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나름의 규칙을 지키고 서로에게 위로가 됐다. 물론 그들 중에는 최초로 눈이 먼 남자의 차를 훔친 그 남자가 있었지만 그들이 겪은 문제의 심각성에 비하면 그의 도둑질은 마음이 다소 불편한 수준이다. 그들은 안과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비록 한 번이기는 하지만 서로 얼굴을 봤고 시선을 교환했던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또 이들에게는 그들에게 우호적인 의사의 아내, 즉 유일하게 실명하지 않은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초기 수용자 집단에서 차를 훔친 남자 혼자만이 처음부터 적대적이었고 그것은 결국 강제 수용소라는 극단적 환경에서 그 스스로 사망에까지 이르게 한다. 이 남자의 죽음은 앞으로 일어날 수용소 내부의 지옥 같은 상황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사건이다.
눈이 먼 이들에게는 당장에 시체를 묻는 일 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앞을 볼 수 있는 의사의 아내가 있었지만 아직 신뢰감이 충분히 않는 타인들 앞에서 자신이 실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며 나서는 것은 위험하다. 폐쇄된 수용소 안 실명자들 사이에서 홀로 앞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장점이 아니다. 자칫 그들의 노예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수용소의 새로운 실명자와 보균자들이 수용되면서 그들 사이의 유대관계는 점점 더 희박해간다.
'백색의 공포'라고 불리는 전염병과 그것과 연관성 있어 보이는 실명은 이제 일상화된다. 그리고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다.
실실명을 하면서 타의(他意)에 의해 버려야 했던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수용소 내부에서 일어난다. 수용자들 중 총을 가진 어떤 남자를 중심으로 조직이 만들어지고 그들은 그 힘을 이용해 다른 수용자들을 지배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서 권력을 쥐고 그 권력으로 음식의 분배권을 장악하고 다시 그 음식으로 금품을 갈취(喝取)하고 색욕(色慾)까지 채우려 한다.
레베카 솔닛이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소개한 실제 사례들과 '눈먼 자들의 도시'의 수용소에서 벌어진 일련의 혼란 또 그 와중에 더욱 빛나는 초기 수용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실명이 왜 돈과 권력에 눈이 먼 인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독자들이 깊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오로지 한가지 욕망에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다면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잊고 잘못된 방향으로 내어 달리기만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죽음이라는 낭떠러지 앞에서도 멈추지 못하고 말 것이다. 설사 그 낭떠러지를 발견했다고 해도 내가 달려온 관성의 힘을 스스로 이겨낼지도 의문이고 또 내 뒤에서 눈이 멀어 달리기만 하는 이들에게 밀려 떨어질지도 모른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죽음의 순간에 시력을 되찾아 내가 떨어지는 낭떠러지의 바닥을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주어진 수명 이후에는 이 세상과 이 물리적 육체에서 떠나야 한다. 그러나 물리적인 죽음 이전에 내 정신을 돈과 권력에 팔아버리고 눈이 멀어 정신의 죽음을 살아가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것을 이 작품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