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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동훈 Dec 17. 2018

키다리 아저씨

어린 날의 소망과 순수한 부질없음에 대해

어린 시절 읽었던 명작동화를 기억하는가? 40대 중반인 나와 연배가 비슷한 독자들이라면 우리의 국민학생(이 명칭은 일제의 잔재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때는 필자가 다닌 곳은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였다.) 시절 독서는 우리네 부모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던 습관이었다.


키다리 아저씨, 소설가 한유주가 옮긴 어린 날의 소망과 순수한 부질없음에 대해


내 경우에는 어린 시절 독서량이 상당히 많아서 당시 집안의 경제사정에 비해서는 과했지만 부모님이 소위 말하는 전집류를 꽤 많이 구입해주셨고 나는 전집류가 배달된 날 100권 중에 30권을 읽어버리는 해괴(?)한 짓을 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20일도 안돼 100권의 위인전과 100권의 세계명작동화 그리고 또 100권의 전래동화를 다 읽어서 결국 1년간 같은 책을 수십 차례 읽고 또 읽었다.   

키다리 아저씨, 소설가 한유주가 옮긴 어린 날의 소망과 순수한 부질없음에 대해


엄청난 독서량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작품을 모두 읽을 수는 없었고 그 부족함은 TV에서 방영되는 해외 만화와 해외 드라마를 통해서도 채웠다. 대부분의 만화가 일본의 대외협력 기금을 통해 무상 제공되었고 당시 정부는 이 사실을 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TV판 일본 만화들을 통해 정서의 목마름을 채웠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가 이끄는 스튜디오 지브리는 자신들의 오리지널 원작뿐 아니라 서양의 동화와 가벼운 소설들을 TV 시리즈로 제작했는데 그중에 상당수의 작품이 한국에도 무상 제공이 되었다. 대표적인 작품들이 '프란다스의 개', '빨간 머리 앤', '엄마 찾아 삼만리' 등이다. 오늘 소개할 '키다리 아저씨'도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소개된 적이 있는데 당시에 제작사가 스튜디오 지브리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일본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다.


내가 키다리 아저씨를 다시 읽게 된 것은 7세 된 BEE 공주가 어느 날 갑자기 이 책에 대해서 물어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 몇 개의 동화이야기를 했는데 그중에 '메리 포핀스'를 먼저 읽었고 이어서 '키다리 아저씨'를 읽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키다리 아저씨'를 생각해보면 이제 막 어른들 특히 부모에 대해 반항을 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우리들의 마음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툭하면 잔소리에 가끔 매를 들기도 하고 갖고 싶은 것을 사줄 능력도 안되는(참 잔인한 생각이었고 이것을 입 밖에 내었다면 너무나 큰 죄를 지은 것일 것이다.) 부모 말고 진짜로 나를 낳아준 부모가 있어서 어느날 '짜안~'하고 나타는 상상 말이다. 그 부모님들은 부자이고 세련되며 잘 생기기까지 해서 나가 부러워하던 2층 집 아이는 그 부모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어서 나랑 친하게 지내려고 하고 선생님도 내 비위를 맞추려고 굽신(?)거리는 것을 상상하면서 내 응어리진 마음을 스스로 위로했던 기억들 말이다. 그런 기억이 없는가? 어허~ 그럼 당신은 참 건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한다.


제루샤 에벗은 고아원에서 자라고 고아원 퇴소 시기가 지나서까지 고아원 동생들을 보살피고 고아원의 이런저런 도우면서 지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존 스미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익명의 후원자가 제루샤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기로 하면서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키다리 아저씨는 제루샤 애벗이 후원자인 존 스미스 씨, 제루샤가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는 이에게 정기적으로 쓴 편지글로 구성이 되어있다. 이 편지를 통해서 독자들의 제루샤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생겼으며 그녀의 생활을 상상하게 된다.



물론 이 편지를 받는 키다리 아저씨도 그랬을 것이다.


사실 10대 소녀의 시시콜콜한 편지를 일일이 읽어내려가는 것은 중년 아저씨인 지금이나 십 대 초반이나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소년 시절에 제일 싫어했던 것은 이 작품의 결론이었다. 제루샤가 결국 키다리 아저씨랑 연애라는 것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캔디가 후원자인 월리엄 아저씨와 사랑에 빠지는 것고 똑같은 스토리이다. 이 얼마나 반 소년감성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키다리 아저씨, 들장미 소녀, 빨강머리 앤 같은 소녀감성의 소설들의 결말은 비슷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이 책을 읽은 여성 청소년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소녀감성을 가진 딸아이를 둘 나이의 아저씨가 다시 이 작품에 대해 논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이 글의 결론을 내려고 한다.



현실을 부정하면서 자기는 고아일 것이라고 이 현실의 부모는 자기를 주어다 키웠고 자기는 멋진 집안의 소생으로 어떤 이유로 버려졌거나 실종된 것이라고 상상을 하면서 자기 위안을 하던 시절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옮긴이 소설가 한유주가 이야기한 것 같은 소녀시절의 감성에 100% 공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생각이 아무리 변하고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만큼 성숙했다고 해도 남자가 여자의 감성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녀도 소년도 비슷한 생각들을 하던 시절에 대한 기억은 되새기고 싶을 것이다. 부질없는 상상이나 쓸데없는 애씀에도 비난받거나 고통받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리던 그시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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