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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동훈 Dec 11. 2018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

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것. 인류는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은 너무나 오래되고 심각한 질문이다.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자신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물음이다. 인생(人生)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없이 보낸 기간이 너무나 길었는지 이제는 잊어져 버린 듯도 보인다. 이 해묵은 질문은 내 어린 시절, 나를 무척이나 괴롭혔다. 과거완료형이다. 나는 이제는 이런 질문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어렵게 무서운 질문을 다시 끌어내 머릿속에 담는 일이 발생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 출연 당시의 배두나

지난 2012년, 국내에서는 인기 있던 축은 아니지만 좀 특이한 이력으로 알려진 ‘배두나’ 가 뜬금없이 ‘워쇼스키’ 남매(당시에는 그렇고 지금은 자매다)의 신작 ‘클라우드 아트라스’에 주연급으로 출연했다는 이야기가 국내에 소개된다. 캐나다에서 열린 어떤 영화제 소식이었는데 당시에 이미 우리나라 배우들이 할리우드를 들락거리던 판이라 ‘뭐 그런가 보다’ 했다. 그리고 2013년 말에 이 영화가 국내에 개봉되면서 배두나의 출연 등으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나도 이 시기에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았던 것 같다.   



클론, 손미 451


내가 주목했던 부분은 배두나가 분한 손미 451이라는 코드명을 가진 클론, 리플리컨트에 대한 팬들의 반응이다. ‘Sonmi451’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클라우드 아트라스’의 팬들 중에 대다수가 ‘손미 451’의 팬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심지어 Sonmi451이라는 프로젝트 명으로 음반을 지속적으로 내는 아티스트도 있다. 


마지막 에피소드, 핵 전쟁 후 지구에 살아남은 지구인들에게 손미는 신적 존재로 알려져 있다.


이런 계기로 결국 데이비드 미쉘 원작의 클라우드 아틀라스도 읽었다. 영화를 통해 접한 본 작품의 요점은 ‘윤회 (輪廻) 사상’이다. 윤회사상을 다룬 영화를 보다니 어린아이 수준의 기독교인이라면 ‘그 영화 보지 마’ 할 수도 있는 주제다. 하지만 막상 본작을 다 읽고 또 보고 난 후에 드는 생각은 다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라는 것은 ‘성불(成佛)’, 해탈(解脫)’, ‘니르바나(Nirvana)’에 이르지 못한 인생이 전생의 업보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 업보에서 벗어나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이 종교의 주요 교리(敎理)이다. 


윤회는 어떤 이가 다음 생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영생(營生)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인생의 굴레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6가지 다른 이야기에서 감추려는 듯 살며시 드러내는 것, 그들이 같은 '윤회의 생'을 살아가는 어쩌면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는 생각보다 복잡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또 그들이 서로 인연으로 닿은 또는 같은 운명을 타고난 연결된 존재이고 전생에 이루지 못한 것을 완성하기 위해 환생한 것이라면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인류의 완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역시 생각해본다.


윤회가 답인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6개의 삶이 환생한 같은 존재라고 결론을 내보면 그 존재는 이루지 못한 생의 어떤 목적(目的)이 있기에 다시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적어도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그렇다. 이것이 맞다고 가정해 보고 애덤 어윙, 로보트 프로비셔, 루이자 레이, 티머시 캐번디시,  손미 451, 자크리. 이들 6명이 공통적으로 살아간 삶의 그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클라우드 아트라스의 주제는 원작의 마지막 에피소드 즉 애덤 어웡의 항해일지 마지막 페이지에 친절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것은 지겹도록 들어온 인류애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단순히 서로에게 잘해야 한다거나 그것이 보편적인 인간들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과학적이다. 즉 인류가 최대한 오래 지속하려면 자원을 공평하고 공정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의 삶에서 나타난 거의 모든 문제가 바로 이 자원의 불균형과 부족에서 나왔다고 본다면 이 결론은 폐부(肺腑)를 찌를 듯이 정확하다. 이것을 바탕으로 6가지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면 거의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 인류 전체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위험한 진보,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정당화되고 미화되는 부조리, 각 주인공들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악한 세력(인간의 욕망 위에 선 권력)과 맞선다는 점,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여기서 다시 윤회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것은 이루지 못한 해탈에 기인하는데 그렇다면 이들이 거듭 등장하는 것은 이루지 못한 어떤 것, 또는 전생에서 만들어진 업보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에서 이들이 고난의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우뚝 솟아 소기의 목적에 가까워져 있음을 암시하지 않았는가. 이에 나는 이들의 관계가 단순히 ‘윤회의 굴레’ 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루고 이루지 못함


애덤 어윙은 근면한 그리스도인임을 자부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모든 사람이 보편 타당한 인간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그가 방문한 식민지에서 인간은 동물에 가까웠다. 약육강식의 자연 이론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인간 군상의 모습에 낙심하고 심지어 자신은 친구로 다가온 어떤 이의 계략에 빠져 죽다 살아났다. 또 자신이 얼떨결에 구해준 한 ‘오리 모리’ 족 청년을 통해 자신의 눈에 쌓였던 위선의 허물을 벗고 참된 인생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찾는다. 결과적으로 그가 꿈꾸던 노예해방은 현실의 역사에서 이루어졌다. 


잘 나가던 사업자 어윙은 항해를 통해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지 결정한다.


로버트 프로비셔는 재능이 있지만 성실하지 못한 작곡가다. 방탕한 생활(도박, 여자)로 재산을 탕진하고 네덜란드의 어느 시골에서 은둔해 산다는 은퇴한 작곡가를 찾아가 기생할 생각으로 그의 마지막 여정을 시작한다. 그의 새로운 생활은 그와 그의 선생 모두에게 좋은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를 도와주는 듯하던 노쇠한 작곡가가 실은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쇠락하던 자기의 명성을 살리려 한다는 것을 알았고 또 이미 회복하기 어려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절망한다. 그런 와중에도 생의 마지막에 ‘클라우드 아틀라스 6중주’를 남긴다. 프로비셔의 삶은 세속적으로는 성공이라 말하기 어렵다. 심지어 그는 가난과 실연의 아픔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물론 그가 전에는 한 번도 곡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점에 그의 마지막은 찬란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천재 작곡가 로버트 프로비셔는 세상의 부조리 앞에 쓰러진다.


루이자 레이는 프로비셔의 친구였던 식스 스미스 박사를 우연히 알게 되면서 원자력 발전소의 문제와 정부 권력자들이 숨기고 있는 거대한 음모를 파헤친다. 물론 이런 거대 기업/관료 조직을 상대로 한 싸움에는 자신과 가족의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결국에 그녀 자신만은 살아남고 원자력 발전소의 심각한 결함과 그를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의 음모를 밝혀낸다. 


진실을 향한 루이자 레이의 열정은 헛된 것이었나?

실패한 출판업자 티머시 캐번디시는 폭력배들과 채무자들을 피해 도피를 하던 중 동생이 예약해 준 호텔에 묵게 된다. 하지만 그곳은 실상 치매 노인들을 수용하는 요양원이다. 평생 어떤 것에도 성실하지 못한 삶을 살아온 그는 요양원 탈출에 온 힘을 쓴다. 요양원에서 만나 친구들과 그곳을 탈출하고 의도하지 않았던 책이 인기를 끌면서 그의 말년에 꽃이 핀다. 이것은 확실히 성공인가? 



손미 451은 파파송 회사의 배양 탱크에서 태어난 복제인간, 클론이다. 단순히 어떤 인간의 DNA를 복제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기 싫어하거나 위험한 일을 대신 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대체물, 리플리컨트 중에 하나다. 또 시키는 일만 하다가 내구연한 이 지나면 갈기갈기 해체되어 다른 자원으로 재활용되는 말 그대로의 물건이다.


차별과 억압은 클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손미 451은 인류의 문제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발생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날 그녀가 '상승'이라고 불리는 자각을 시작하면서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고 그것은 이후 인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결국 그녀는 자기 운명을 받아들인 결과로 처형 당하지만 대신 대다수 인간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자각의 과정을 남겼다. 이 역시 실패인가 아니면 성공인가.    


겁쟁이 자크리는 자신 안에 있던 희망을 끌어낸다.


어느 시간, 인류 문명이 사라질 규모의 전쟁 이후 외딴섬에 사는 자크리는 어린 시절 자신의 부주의로 아버지를 잃고 형을 노예로 끌려가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산다. 어느 날 전쟁 전 문명을 가진 메로님의 방문으로 그는 인류의 조상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결국 폭력적인 코나 족이 섬 전체를 약탈하고 그는 가족을 지키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섬, 광야로 탈출하여 생을 이어간다. 더불어 아이들이 태어나고 인류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다.


파파송 회사의 종로 관철동 식당


서로 다른 배경들, 서로 다른 사건들과 거기에 구술 방법과 문체마저도 조금씩 다른 이 6가지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은 실패하거나 성공한다. 하지만 늘 그 끝이 아쉽고 슬프다.  대부분 인생이 그렇듯이 말이다.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윤회 대상이 어떤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 아니고 때로는 누구인지도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굳이 나열해 보자면 윤회의 주체는 어윙, 프로비셔, 레이, 캐번디시, 손미, 메로님인데 캐번디시 이야기에서는 혜성 모양의 모반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 이전 생의 기록을 본 순간 느끼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도 모호하다. 마지막 이야기의 화자이며 그 어떤 목적으로 다가가는 실제 주체인 자크리는 정작 윤회의 증거인 모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와 함께 이야기를 진행해가는 메로님이 그 모반을 가지고 있다. 윤회라는 개념을 좀 더 확장할 수 있는다는 희망의 증거들이다.


결국 나는 이들이 겪는 윤회의 굴레가 표피(表皮)적인으로 해석된 불교적 그것과는 다르다고 결론냈다. 전생에 이루지 못한 열반 또는 업보를 해결하고 완성하기 위해 다음 생을 사는 것이라기 보다.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며 어떤 목적을 이루려는 흐름이 이들 사이를 존재한다는 것이다.


구름 끝에는 무엇이 있길래?


저 구름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에 내가 찾는 그곳, 그것이 있지 않을까? 

꽤 철학적인 명제로도 보인다. 또 종교적으로 볼 때도 큰 의미가 내포된 듯해서 보고 듣기에 좋다. 하늘을 물로 보고 구름을 '하늘 물 위에 뜬 징검다리'로 본다면 유대교의 교리와도 비슷하고 '건너가보면 그것이 있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불교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와도 같은 이야기처럼 보인다.


인류의 미래는 이럴까?


인류가 찾아야 할 것 즉 구름 길을 따라 건너가서 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손미 451이 '유일회'에게 체포되기 직전에 완성되고 재판에서 선언한 교리에 정리되어 있다. 또 그것은 어웡의 일지 마지막에 저자가 어웡의 입을 통해 주저리주저리 풀어서 실천 과제로 말하고 있다.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에 이르기까지 늘 평안(평화, 안녕) 하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가 고민을 해왔다. 그것이 인류에게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배부르고 따뜻하게 사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약한 신체구조를 가진 인류는 포식자나 먹잇감을 죽이는 방법을 찾아낸 이후 그런 것들에서 행복과 평안을 찾아왔다. 그들의 뇌가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발달한 후에는 물질과 권력을 쌓으면서 그것이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 믿어왔다.  


코나 족이 악한 것은 그저 먹고살기에 열심이기 때문이다.


악당들은 친구의 가방에서 돈을 훔치기 위해 위험한 항해를 무릅쓰고 거짓 행동을 일삼는다. 같은 처지임에도 자기보다 약한 종족을 노예로 부린다. 자신의 평안을 위해 상대를 희생시키며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는 타인의 약점을 이용하고 그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까지도 속인다. 그렇게 타락하다가 결국 더 커진 평안에 대한 목마름으로 자신과 동족의 터전도 팔아버릴 기세로 달려든다. 결국 어느 날 동족을 노예로 부리는 것도 성이 안 찼는지 동족을 죽여 그 고기로 내 배를 채울 것이다. 그렇게 멸망으로 치닫다가 문득 잠시 뒤돌아보면 주위에는 아무도 또 아무것도 없는 공포스러운 고요의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문명이 거의 사라진 전쟁 후 외딴 섬, 작은 희망의 씨앗까지도 당장에 먹고 마시고 배설해버릴 것으로 소모하는 코나 족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구름 끝에 무엇이 존재할지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고 외치는 이가 광야에 있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 그들은 작고 약한 존재이지만 가슴속에는 희망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작은 불씨다. 그 업보 때문에  어윙, 프로비셔, 레이, 캐번디시, 손미, 매로님, 자크리 가 그들의 힘겨운 삶을 열심히 살다가 죽은 것이다. 



그들이 같은 존재가 아니더라도 구름 위에는 그 흔적이 남아있다. 누군가 그 길을 걸어왔을 것이고 내가 걸어갈 길이고 또 누군가 걸어갈 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우리 중에 어떤이었을 것이고 어떤 이이며 어떤 이일 것이다. 인류는 결국 하나에서 시작된 개별적 존재이면서 또 하나가 되기 위해 앞으로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지속 가능한가?


지금은 알 수 없다. 만일 내가 하루하루 먹을 것과 입을 것만 걱정하고 남과의 비교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생각으로만 산다면 언젠가 내 주변은 내가 죽인 것들의 흔적으로 채워질 것이다. 반면 내가 나의 친구들, 나의 자녀를 위해 내 배 채우기를 조절하며 산다면 그 인생들의 시간은 조금이라도 연장될 것이다. 그 범위가 넓혀진다면 그 지속 시간은 조금 더 연장될 것이다. 그 후에 어찌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내 생각 밖의 것까지 고민하며 살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고 또  아름답다. 여기까지 생각하느라 이미 잠을 설쳤으니 이젠 좀 쉬어볼까한다.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내 안에 탐욕이 있다는 증거다. 남과의 비교에서 만족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기에 그 비교 후에는 반드시 절망하고 욕망한다. 이어 그 결단(決斷)은 남을 밟고 올라서서 기어이 꼭대기에 설 만큼 강력해질 것이다. 내 선택은 결국 자기 몫이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 그 책임이 언제 지워질지 또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사람들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결국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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