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동훈 Oct 11. 2018

믿음과 두려움의 차이, 13번째 전사

무엇을 믿고 따를 것인가?

13번째 전사는 쥐라기 공원의 원작자 마이클 클라이튼의 소설 시체를 먹는 사람들(Eaters of the Dead)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연기를 볼 수 있는 가장 최근(하지만 꽤 오래된, 요즘 이 친구는 무엇을 하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작 중에 하나다. 영화의 배경은 중세로 추정되는 시기의 북유럽이다.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노르만이고 그들이 사용하는 배는 바이킹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을 봐서 바이킹들이 남하하여 정착하던 시기로 보인다.

13번째 전사

이야기의 화자는 아바스(‛Abbāsid) 조(朝) 시대(AD. 750∼1258)의 시인으로 추정되며 바그바드에서 영화를 누리며 살았고 사실상의 유배생활을 노르만 사이에서 시작한다. 말도 통하지 않는 그들 사이에 히랍어로 통역이 가능한 삼촌 멜기세덱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이 시니컬한 삼촌의 이름이 왜 멜기세덱인가? 이 이름은 '말라크(מָלַךְ)'와 '사다크'로 분리해서 해석해야 하는데 사도 또는 그와 그 비슷한 의미로 정도로 해석이 된다. 하지만 영화상에서는 조카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 신학적인 뭔가가  있지 않을까'하는 섣부른 예측을 하게 하는 설정이다.


그럭저럭 이들의 유배생활도 견딜 만 해질 무렵 이 북구인들 사이에 소동이 벌어진다. 그들의 동족 중 한 부족이 '악마의 습격을 받고 있다'며 원군을 요청한 것이다. 그들의 전통상 이럴 경우 반드시 도움을 주러 원정을 가야 하는데 주술사는 13명의 전사가 가야하며 마지막 전사는 외지인이어야 한다는 신탁을 전달한다.


13은 바이킹의 달수에 해당하는데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불길한 숫자 즉 그리스도의 제자 중 '가롯 사람 유다'를 상징한다. 아무튼 13번째 전사는 외지인이어야 하니 마을에 머물던 두 명의 이방인을 지목한 것이나 진배없다.



다른 작품들에서 보면 이런 기이한 문제는 전문가(여기서는 전사)아닌 일반인, 현지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외지인이 해결하곤 한다. 다른 시각이 필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늘 엉뚱한 사람이 나서곤 한다. 12명의 노르만족 전사 사이에 아랍 시인, 이런 부적절해 보이는 조합 역시 문학 작품에서는 익숙하다. 주인공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에 발탁이 되어 동료들과 시련을 함께 겪으며 성장하고 더불어 공동체의 문제도 해결하는 성장 스토리도 뻔하다.


12명의 노르만 전사와 한 명의 이슬람 시인 또 역할이 불분명한  아저씨 한명이 함께 떠난 원정에서 신비스런 일이 일어난다. 야영지에서 서로 우스갯 소리를 하던 노르만 전사들은 장난으로 시인에게 욕을 한다. 내용은 즉 그가 '어머니도 모르는 아들'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후래(호래)자식’이나 서양의 ‘Sun of the Beach’와 같은 의미다. 노르만의 대화를 계속 지켜보던 이슬람 시인은 그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모욕하자 발끈하여 그들의 언어로 화를 낸다. 


그는 유배(?)생활 중에 그저 아무 생각없이 산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단어와 문장의 법칙 즉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시인이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접근에 있어 일반인과 다른 능력이 있었을 것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가 언어를 다루는 기술에 능해서만은 아니다. 언어가 통하자 그들 사이의 반목이 금세 사라진다. 그들에게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식객이며 심지어 전쟁을 하러 가는 길에 딸려온 용도를 알 수 없는 짐같은 외국인이 친구가 된 것이다. 


지원을 요청한 마을에 도착하니 상황은 심각했다. 마을은 방어준비가 안되어 있었고 마을의 지배자는 쇠락하였다. 그 와중에 그의 아들은 권력을 탐하고 있다. 하나 둘씩 나타나는 괴물의 흔적은 끔찍하다. 첫 번째 전투 후 노르만 전사들은 동요하지만 시인 아메드 이븐 파들란은 오히려 침착해진다. 



무엇을 믿고 따를 것인가?


노르만족들과 이슬람 시인의 우정 만을 그렸다고 보기에 원작이나 영화의 내용이 무척 진지하다. 많은 평들에서 공통적으로 이 영화의 연출력과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연기력을 이야기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아메드 이븐 파들란이 지속적으로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눈여겨 봤다. 그는 자신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늘 어느 상황에서도 담대하길 기도한다. 


마이클 크라이턴의 소설 시체를 먹는 사람들(Eaters of the Dead)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어느 순간 일어난 그의 변화는 그의 인간적 능력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전사로서의 능력을 갖춘 그의 동료 노르만 전사들의 변화와 비교하면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그들이 믿었던 전투력·체력·판단력은 그들의 수준을 넘어서는 상황에서 여지 없이 무너졌다. 상대가 용(龍)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서자 그들은 두려워한다. 반대로 확고한 믿음을 가진 다른 이는 자신의 믿음을 상기시키며 상황을 다르게 판단하고 맏서고 오히려 강해진다. 


이 이야기가 알라(이 호칭의 뜻은 ‘신’을 의미한다.)나 오딘으로 지칭되는 이슬람과 노르만의 신에 대한 이야기라면 여호와의 백성인 나는 감히 이런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믿는이가 보여주는 진정한 용기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노르만들도 신을 믿는다. 그들은 ‘오딘’을 대표로 하는 다신관(茶神關)을 가지고 있었고 두려움의 순간에 신에게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도 한다. 그들의 기도는 자신의 육적인 삶을 보호하기 위한 기도이고 오딘이 누구인지 왜 자신들이 세상에 왔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즉 그들의 믿음이라는 것은 항상 현재 자신의 삶이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당장에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 닥치면 그렇게 무너지는 것이다. 만일 시인의 믿음도 같은 수준이었다면 가장 먼저 무너졌을 것이다. 


진정한 믿음을 지닌 자들에게는 자기 스스로 이해되지도 않고 증명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