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깁슨, 대선 후보 수락 자리에서 언급하기엔 너무 큰 세계관
SF는 '공상과학소설'이라고 싸잡아 분류하기에는 너무나 큰 세계관을 담고 있다. 개중에 공상에 머무는 글들이 간혹 발견되지만 지난 세기부터 사랑받은 이 분야 명작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 소재는 물론 주제와 쓰인 방식조차 다양하여 그 내부에도 나름의 분류 표가 존재할 정도다.
우리가 비교적 쉽게 접하는 SF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다. 일반적으로 이 장르는 미래나 다른 우주를 배경을 삼고 있기에 화려한 메카닉과 독특한 자연환경으로 관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그것으로 인해 '전쟁'같은 뻔한 상황조차 특별하다. 진부한 스토리 전개나 캐릭터 역시 SF에서는 다르게 다가온다. 하지만 비주얼과 액션에 가려 담긴 세계관, 가치관이 가려지는 경우 역시 흔하다. 이 장르는 나름의 심오한 사상들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모든 대중을 이해 시 키 어렵다는 것은 액션 영화로 전락하는 이유 중 하나다.
뉴 로맨스는 정치인 안철수가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에서 원작자 윌리엄 깁슨(William Ford Gibson)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때 반짝 인기를 얹기도 했다. 안철수가 이때 인용한 문장은 이런 식이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The future is already here. It's just unevenly distributed.)' 이것은 캐나다 작가 윌리엄 깁슨의 유명한 인터뷰 내용 중에 하나이다. 이 문장은 깁슨의 꽤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는 문장이다. 따라서 이후 안철수가 자신의 욕망을 에둘러 표현하기 위해 부적절하게 인용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아무튼 안철수의 인용으로 윌리엄 깁슨과 그의 출세작 뉴로맨서는 갑자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필자도 SF의 고전들을 읽을 만큼 읽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윌리엄 깁슨은 당시에 처음 알았다. 그의 대표작 뉴로맨서 1984년에 발표됐고 그의 데뷔작이다. 이 책은 또한 사이버펑크 장르를 완성한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뉴로맨서는 당시 인기로 세계적에서 7천만 부 넘게 팔려나갔다. 또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SF 3대 상 모두를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작품이 주목받는 것은 작품이 발표된 시대상에 있다. 1980년대는 화면 가득 문자만 가득하던 데이터 통신의 여명기이다. 하지만 깁슨이 사이버스페이스 즉 가상현실과 몰입이라는 기술 구현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이 개념 자체가 고루하게 느껴지지만 작가가 뉴로맨서를 저술할 당시에는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컬러 모니터조차 존재하지도 않았고 ON/OFF의 두 가지 동작을 하는 전광판 같은 모노크롬 모니터만 존재하던 시대였다. 때문에 가상세계의 환경과 기술적 배경을 섬세하게 그려낸다는 것 자체가 고무적이다.
어떤 이들 그가 본 소설에서 그려내는 사이버스페이스로의 접속 또 다이빙 시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관련 시스템에 대한 작가의 무지를 드러낸다고 평가한다. 이는 SF의 한 장르인 하드코어의 영향이다. 해당 묘사가 기술적 연구 또는 관련 전문가의 컨설팅을 통해 씌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겠지만 설사 판타지에 가깝다고 해도 SF의 본질을 벗어난다고 질타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SF 역시 문학적의 한 장르라는 점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 게다가 앞서 설명한 대로 1980년대 초반의 가상현실에 대한 연구 대부분이 그 개연성(蓋然性)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1982년에 이미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의 선악의 대결을 그린 '트론'이 개봉을 됐고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미 만들어디고 있었기 때문에 깁슨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뉴로맨서가 오로지 그의 공로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한편 뉴로맨서는 이후 한때 유행하던 사이버펑크 문학과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데 마사무로 시로(士郞 正宗)의 '공각기동대'가 대표적이다. 심지어 만화 속에 등장하는 두 인물 '모토 코'와 '바토'에서는 뉴로맨서의 주인공 몰리의 영과 육체가 전이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특히 나토의 이식 렌즈가 그렇다.
소설에 등장하는 두 AI, 원터뮤트와 뉴로맨스는 그들이 설계한 어떤 사람의 계획대로 '자유기'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원 터 뮤트는 AI라는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프로젝트를 수행 중인 뉴 로맨스를 제거하려고 한다. 이것은 삶이 죽음*을 지배하려는 시도이다. 인간의 삶이 인간의 손을 벗어난 영역을 지배하려는 시도이다. 오래전에 인간이 저지른 범죄처럼 신을 죽이고 영생을 획득하려는 시도이다. * 뉴로맨서라는 이름은 뇌의 수용체 뉴로와 죽은 자의 영혼을 사후 세계로 인도한다는 네크로맨서에서 '맨서'를 떼어내 붙여 만든 것이다.
'니체는 신을 죽였다. 그리고 니체는 죽었다.' 이런 우스갯소리를 기억하는가? 19세기 합리주의는 인간의 이성에 절대권력을 부여했다. 지난 세기, 인류 진보의 원천은 스스로 신에 가까워지려는 시도들이다. 하지만 신을 땅에 묻어버린 진보 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문득 버나드 쇼의 묘비에 새겨진 해학이 생각난다. '이렇게 될지 몰랐지'
마약쟁이 아나키스트이며 생계를 위해서는 어떤 위법도 저지르는 카우보이(크래커 또는 해커) 케이스와 살인 청부업자 몰리가 누군가로부터 프로젝트를 의뢰받는다. 독자는 이들이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을 따라가며 흥미진진(興味津津) 하면서도 썩 유쾌하지 않은 미래를 보게 된다. 또 케이스가 사이버스페이스로 다이빙하는 과정은 오색찬란한 색을 통해 느끼게 된다. 여기서 하나 고백할 것이 있다. 나는 글로 표현된 공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름의 장애를 앉고 산다. 따라서 그 느낌을 적절히 표현하기 어려운데 대신 꼭 알고 싶다면 직접 그려본다.
우리가 인생의 종국에 마주 해할 것은 첫째 살아온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며 또 우리는 앞으로 어떤 존재가 돼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유명인에 의해 언급된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The future is already here. It's just unevenly distributed.)'는 단지 단어적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단어적 '미래'만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와 있을 수 없다. 두 AI의 계획, 또 그들의 코어를 설계한 한 인간의 계획, 여기에 인간을 만들었다는 또 다른 어떤 존재의 생각은 이미 우리에게 와 있거나 아니면 이미 진행 중이다. 단지 우리가 그 계획을 제대로 인지하고 행동할 때만 그 미래가 현재로 다가온다. 만일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고 충분히 신실하지 않다면 그 계획된 미래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착각은 매우 창조적이다. 누군가의 말 한 것처럼 미래가 와있다고 착각하며 그걸 믿고 돌진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