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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스트파이브 Mar 22. 2019

"사유의 용량을 늘려서 내 안의 단단함을 찾았으면"

패스트파이브 멤버 '파시클 출판사' 박혜란 대표 인터뷰

마지막으로 시집을 펼쳐본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하시나요? 바쁜 일상에 쫓겨 시집은커녕 책장을 넘겨본 기억도 가물가물한 분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겨우 시간을 내서 서점에 들르면, 왠지 모르게 자기계발이나 일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집어들게 되죠.  





이번 FASTFIVE Member Interview에서 만난 분은 파시클 출판사의 박혜란 대표님입니다. 한 시인의 작품들을 모아 고르고, 옮기고, 엮어 책으로 펴낸 대표님은 독자들이 가끔은 '남의 다리 긁는 책'을 읽었으면 한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시인들의 단단한 내면을 닮고 싶다는 대표님의 인터뷰를 함께 보시죠. 



Q. 대표님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와 운영 중이신 기업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출판사 파시클을 운영하는 박혜란입니다. ‘파시클’은 이렇게 작은 책의 한 덩이를 말합니다. 특히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 하나 하나를 부를 때 많이 쓰는 말이에요. 작은 책을 만드는 출판사이기도 하고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번역하고 소개하기 위해 시작한 곳이라 이름을 파시클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그중에서도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시인을 공부했어요. 에밀리 디킨슨은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한번도 출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파시클, 원고 뭉치로 만들어서 옷장 속에 숨겨놓고 있었죠. 이미 에밀리 디킨슨 번역서가 많이 나와 있기는 하지만 더 다양한 해석과 함께 소개되지 않았던 작품을 중심으로 내놓기 위해 출판사를 만들었습니다. 본격적인 비즈니스라고 하기에는 소박한 시작이었죠. 첫 책은 2018년에 나왔네요. 원래는 원고 더미로만 존재했던 여덟 편의 묶음을 하나로 모아 낸 책이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입니다.  



Q.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원래는 번역과 강의 일을 했습니다. 주로 페미니즘 책, 문학 이론서 등을 번역했어요. 앞으로 제가 하는 작업도 거기서 많이 벗어나지는 않을 거예요. 또 국내외의 불교 학자들을 서포트해서 조계종에서 우리나라의 불서를 영어로 옮기는 작업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번역을 넘어 책을 만드는 재미도 알게 되었죠. 언젠가 ‘내가 직접 책을 만들어봐야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Q. 본격적으로 출판사를 차리고자 결심하신 계기가 있나요?


저는 뭔가 하면 엄청 열심히 해요. 또 나름대로 모범생이라,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국고로 펀딩을 받았다면 그 돈을 제가 계획서에 쓴 그대로 사용해야 하는 식의 강박이 있어요.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작업이 진행되기도 했고 책임에 대한 부담도 너무 커진 탓인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일하니 건강이 안 좋아져서 갑상선 암이 생겼죠. 그러면서 연구원과 강의를 그만뒀고, 내가 그동안 공부했던 것들을 활용해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게 계기예요. 

일러스트 작가와 협업하여 파시클 형태로 내놓은 에밀리 디킨슨의 작품


그래서 저는 힘들게 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편집하는 분들이 보통 일하는 걸 ‘뼈를 갈아 넣는다’고 표현하시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젊은 분들의 속도대로 일하기가 어려우니까 제 상황에서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일하려고 노력하죠. 일러스트, 디자인, 편집 작업으로 협업하는 분들과도 즐겁게 일하고요. 책이 늦게 나오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대신 모든 작업자가 즐거운 독자일 수 있는 방향을 추구합니다. 

모임도 많이 가지고, 독자들과 시에 대해 직접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들려고 해요. 책을 만들 때 독자들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반영하려고 합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그래서 패스트파이브가 좋아요. 편의에 따라 다른 지점도 이용할 수 있어서 홍대점이 아닌 다른 지점에서 책 읽기 모임도 했어요. 



Q. 파시클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일단 많은 출판사들이 그렇듯 망하지 않는 게 목표고요(웃음). 지금은 인간적으로, 재미있게 작업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는데 앞으로는 조금 더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일할 수 있는 모델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식으로든 번역을 계속 해서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한 해에 한 권씩 계속 내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다른 출판사와 계약해서 작업하고 있는 번역도 있고요. 

국내 저자와 작업도 하고 싶어요. 국내 여성 작가들의 책을 내려고 합니다. 꼭 시가 아니더라도 ‘2019년 이 시점에 가장 페미니즘다운 문학, 글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문학이 꼭 소설이나 시여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좋은 시, 소설도 많지만 지금 막 목소리를 내고 있는 많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글이 훨씬 더 문학적이고 큰 울림을 준다고 생각해요.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국내 여성 작가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Q. 대표님이 이 일을 하면서 가장 기쁘고 뿌듯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을 내고 나서 ‘언리미티드 에디션 서울 아트북페어’에 초대 받은 적이 있습니다. 강의실에서 혹은 세미나나 워크샵을 하면서 만났던 독자들과는 다른 독자, 직접 돈을 주고 이 책을 산 독자를 만나는 경험을 처음 했어요.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독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직접 듣고 그분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에밀리 디킨슨의 책을 엮어서 내기 전에는 제가 직접 작품에 대해 강의하고 소개해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반대로 독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번역한 작품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요. 작년에 가장 기뻤던 경험인 것 같습니다. 



Q. 이 일을 통해 이루고 싶은 가치가 있으신가요?


에밀리 디킨슨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번역서가 꽤 나와 있는 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번역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존 출판사들의 입장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고전’으로 분류되는 많은 작가의 글이 새롭게 읽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를 거치며 사회의 철학이나 사고방식이 많이 바뀌었잖아요? 시스템도 많이 바뀌었고요. 자연히 ‘고전’이 무엇인지도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파시클 형태의 작품집을 엮어 낸 첫 단행본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


새롭게 읽힐 수 있는 고전들을 선택해서, 왜 그런 선택을 했으며 이 책을 어떻게 새롭게 볼 수 있는지 보여주는 번역 작업을 하고 싶어요. 다른 출판사와 작업을 하다 보면 그곳 나름의 시스템이나 경영, 수익 구조 등 고려할 요소도 많습니다. 하지만 파시클 안에서는 저의 의도대로 많은 작업을 해볼 수 있으니 여러 시도를 해보려고 합니다.  



Q. 대표님의 개인적인 목표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사실 저도 아직 목표를 찾는 중입니다. 직장을 그만둘 때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조직 안은 정글이지만 밖은 시베리아라고요. 이렇게 생존 자체가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제가 하는 이야기가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파시클 출판사의 작업 안에서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물론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 버틸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고요. 본격적으로는 만 1년, 이제 2년 차에 접어들었는데 초반에는 즐겁기만 했다면 이제 조금씩 무서운 부분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함부로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Q. 사무실로 이곳 패스트파이브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요즘 출판계에는 일인 출판을 하면서 서점을 운영하는 분들도 많은데 저는 이런 비즈니스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임대나 계약 같은 일과 거리가 멀어서 무섭기도 했고요. 그런데 직장에 다니는 제 딸이 요즘에는 공유오피스를 많이 사용한다고 알려줬어요. 

또 홍대점은 근처에 출판사도 많고, 작가와 아티스트들도 가까이에 많이 계셔서 함께 작업하기 좋잖아요. 그래서 패스트파이브 홍대점에 방문했습니다. 당시 홍대점에 계시던 정희주 매니저님과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제 입장에서 친절하게 상담해주셔서 바로 계약을 결정했습니다. 지금까지 패스트파이브를 이용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어 좋았어요. 독서 모임도 할 수 있고, 그림 그리는 분, 디자인 하는 분들과 소통하면서 인터랙티브하게 작업할 수 있었고요. 



Q. 대표님이 하고 계신 책 읽기 모임을 소개해주세요. 


책을 매개로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독서 모임을 많이 합니다. 매주 시 읽기 모임도 하고, 저와 비슷하게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권하는 책이라면 뭐든지 읽는 모임도 있어요. 작가, 화가, 사진작가, 독립영화 감독, 사회복지사, 공무원, 편집자, 활동가,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죠. 제가 길잡이 역할을 하는, 번역에 관심 있는 분들과 함께 원서를 읽는 모임도 있고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으면서 만나게 된 모임도 있어요. 그 모임에서는 몸에 대한 사유를 하는 책을 모아서 읽습니다. 독서 모임 하는 사람들과 모여서 한 달에 한 번씩 영화도 봐요. 매주 서점에서 마련해주시는 시 읽기 모임도 하고요. 

제가 육아를 하는 여성이었다거나 강의를 하는 등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많은 모임은 못했겠죠. 연구와 강의를 그만두면서 바뀐 생활 패턴입니다. 독서 모임을 하려면 책 읽을 시간도 내야 하니까 한동안은 번역할 시간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최소한 4시간 이상은 번역에 쏟을 수 있도록, 절대적인 시간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새벽같이 출근해보기도 하고 나름대로 바쁘게 살아요.



Q. 지금까지 일을 해오면서, 여성으로서 힘든 점이 있으셨는지, 또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말도 못하게 힘들죠(웃음). 하지만 제 이야기를 하는 건 민폐일 것 같아요. ‘이렇게 하면 안 되는 방식’으로 살아왔거든요. 저는 다 잘하고 싶었어요. 엄마 세대는 그렇잖아요. 그래서 정말 미친 사람처럼 바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집안일도 하고, 아이 교육도 잘 시켜야 하고, 제 공부도 해야 하고, 번역과 강의도 하고… 학교 생활을 하려면 사람도 많이 만나고 네트워크를 만드는 작업도 필요한데 그런 일은 전혀 못 했어요. 기본적인 부분만 챙겼죠. 남들에게 권할 만한 사회 활동 방식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대신 이런 경험을 한 덕분에 그렇게 사는 일이 어렵다는 건 알아요. 다른 분들과 함께 일할 때 그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겠지만 그 이해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Q. 그럼 어떤 삶의 방식을 권장하고 싶으세요?


시인들이 많이 힘들잖아요. 우울함도 있고, 경제적으로 힘들 수도 있고, 특히 19세기에 활동한 여성 시인들의 경우 시인으로 정당하게 인정 받지 못한 경우도 많죠. 가부장제 아래에서 결혼을 하면 한 대로 안 하면 안 한 대로 괴로웠을 테고, 글 자체가 폄하되고, ‘여류 작가’에 머물게 되고… 심지어 에밀리 디킨슨은 생전에 시를 한 편도 출간하지 않으면서 1,800편이 넘는 시를 썼습니다. 제가 죽기 전까지 다 소개할 수 있을지 모르겠을 만큼 많은 수죠. 많은 시인들이 이처럼 객관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단단한 내면을 가지고 끊임없이 글을 썼습니다. 단단하게, 강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살다 보면 더럽고 치사하지만 기존 시스템과 협상할 수도 있고 숙일 수도 있고 어이없게 당할 수도 있죠. 그때 저항하거나 반발하는 모든 행동이 나에게 상처가 되잖아요. 그럴 때 내면에 단단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 단단함을 찾아야할 것 같아요. 물론 저도 아직 답을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찾으려고 노력해야죠.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요즘 독자분들은 자기계발서나 실용서처럼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책을 많이 읽으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가끔 ‘남의 다리 긁는’ 책들이 있잖아요. 그런 책을 읽고 평소와 다른 생각도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나와 상관 없어 보이는 책들이요. 그 과정에서 나에게 중요한 걸 얻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최근에는 꼭 읽어야 하는 중요한 책이 굉장히 많아서 그만큼 뒤로 밀려나는 작품과 책도 많습니다. 그런 작품, 그런 시들을 찾아서 소개하는 게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독자 입장에서도 그런 책을 많이 찾아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파시클의 책이면 너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요. 

예를 들어 흑인 여성 작가의 책이라든지 나와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글도 많이 읽고, 장르로 보자면 시나 철학적 에세이 같은 것들도 많이 읽어서 사유의 용량을 늘려보면 좋겠습니다. 그게 곧 내 안의 단단함을 찾으려는 노력 중 하나겠죠. 






우리가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배려하려면 아주 제한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사유를 담은 책들은 그 상상에 도움이 되어주죠. 박혜란 대표님의 말씀처럼, 이번 주말에는 '남의 다리 긁는 책'을 읽으면서 나의 내면을 단단히 하고 타인의 삶을 이해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럼 저희는 다음 인터뷰로 돌아오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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